일상에서 낯섬찾기.
농사는 매해 뿌린 만큼 겨우 거두는 정도이더라도 밭에서 햇빛이나 모기를 피할 길 없어 완전히 순응하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좋아한다. 작년 초 ‘땅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 빌었더니 여기저기 밭이 빌어와졌다. 간드락 마을에 하나 집 뒷자락에 하나 여기 저기 흩어진 밭 세 덩이에서 듬성듬성 텃밭을 일구고 있다보니 그것에 더해서 학교 농사수업까지 맡게 되었다.
한 날은 농사수업 할 땅을 무상으로 빌려준 밭주인에게 보은하고자 탱자나무 사이 김을 맸다. 아무리 손놀림이 조심스러워도 익숙하지 않은 이 나무가 가진 가시가 난무하는 나무가지를 피할 길이 없어서 난감해질 즈음에 맞은편에서 풀을 뽑아내던 교사 봄이 불쑥 말했다.
“예전에는 고동을 탱자가시로 쑥 뽑아내어 먹었는데. 탱자가시를 잘라서 고동먹을 때 줬어요.” 그러고보니 이쑤시개 대용으로 그만한 것이 없겠다 싶었다. 그는 탱자나무 사이에서 문영숙 작가의 <에네껜 아이들>을 꺼냈다.
에네껜은 멕시코의 거대한 선인장인데, 1905년 즈음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멕시코로 향하는 아이들이 1년이 지난 후 오히려 말도 안되는 값으로 받은 노동삯과 현지의 생활비의 격차로 빚더미에 앉아서 한 해를 더 울며겨자먹기로 보내고 돌아온다는 내용에 머금은 어떤 삶의 단면에 대한 이야기 며칠 후에 작가와의 만남이 있으니 관심있다면 오라는 담백한 초대도 함께.
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나는 내 키의 반 만큼 기세좋게 자라올라온 망초를 뽑아내고 내느라 부산했고, 가시들도 나를 긁기도 찌르기도 했지만 더 이상 낯설고 뾰족한 그것들을 개의치 않았다. 나는 '고동'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나의 오래된 시절에 푹 젖어있었으므로. 앞으로 탱자나무의 가시를 보면 에네껜을 떠올릴 것이고 해녀였던 할머니가 한 냄비 끓여주던 고동의 김이 눈에 서릴 것이다.
텃밭을 매개로 하는 이야기가 풍기는 낭만과 땀이 쏟아지는 짭쪼롬한 현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텃밭에서의 시간에 애정이 쌓여갔다. 약속되지 않은 주제가 예기치 못한 매개를 통해 툭툭 시공간을 초월하는 세상으로 내 던져지며 나의 세계를 늘려내는 것이 오감을 자극하며 펼쳐지는 것이 짜릿했으므로
며칠 전 솔로플레이백 워크숍에 참여했다. 즉흥극의 한 형태인데 텔러(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들려주는 삶을 관통해 흐르는 갖가지 이야기가 쏟아져나오고, 그것은 배우를 통해 번역되는 즉흥적 몸짓과 해석으로 표현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즉흥극에서는 배우가 된다.)의 세상을 엮어 그려내는 것은 마치 화풍이 없이 자유한 아이들의 그림을 보며 일어나는 뭉클함 같은 것이 있다. 워크숍에서 나는 배우가 되기도 하고 텔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거스를 것 없이 푹 꽂힌 진행자의 한 마디,
"전환에 나를 먼저 던져놓고, 어떤 일이든 일어나게 둔다."
2인 1조가 되어 배우와 텔러를 정한다. 배우는 텔러에게 들은 것을 바탕을 모놀로그 중 텔러가 들려준 이야기의 톤(Color)정서(Emontion)몸짓이나 행위(Action)를 변주하라는 주문을 하면 즉시 바꾸는, 즉 전환을 연습했다.
텔러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서사를 놓지 않되, 예측할 수 없이 던져지는 전환에 놓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쉽지 않았으므로 버둥거리고 생각이 멈추고 버벅거렸다.
그것은 마치 익숙하지 않은 곳에 낯선 풍경에 당도하였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숨은그림찾기와 같다. 생각할 틈 없이 기꺼이 나를 내던지는 경험은 날것이 도려내어지는 것 같은 긴장이 서려있으면서도 입체적인 형태의 드러남을 기꺼이 허용해야만 바로 앞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인의 이야기의 형태를 직관하고 있는 이를 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날의 텃밭을 생각한다. 탱자나무의 가시의 낯선 감각이 봄의 이야기를 통과하며 할머니의 찐 고동을 연상해내는 동시에 나의 세계는 사방으로 뻗쳐나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한 부드러운 전개이든, 스스로를 전환의 역동에 던져 일어나는 전개를 관조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든 일상안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나를 내어놓는 일에 주춤거리지 않기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