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예측불가능한 여정

진한 오리탕 국물에 녹아있던 문장들

by 쓰임

도서관에 가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것과 닮아있다. 보통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하기도 하고 그렇다할 의미가 없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읽어보고 싶은 책을 찾으러 간 섹션에서 목적지와 같은 '그' 책에 부여된 고유번호를 찾아 훝다보면 사로잡히는 책 한 두권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목차도 보지 않고 무심하게 펼쳐 한 장즘을 읽어보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보통은 기대하지 않은 것에서 주의하지 않는 사이 내 안에 축적되어 온 무수한 작은 변화들이 일으킨 혁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본다는 점에서, 폭죽의 화염 안에 서 있는 기분으로 고요한 책장사이에서 희열에 감싸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렇게 마주한 문장들을 책장사이에서 소리없이 읽었다. '모든 영혼의 진화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공포. 모색. 사랑 모든 이야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한 가지. 이 각성의 세 단계이다. 이 세 단계는 하나의 생 또는 여러 개의 환생을 통해 진행될 수도 있지만 하루, 한 시간, 혹은 1분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다.'


오리탕 뚝배기를 휘저어 식히는 그를 앉혀두고 그의 의사는 따로 묻지 않았다. 왁자지껄 주변을 아랑곳않고 넉살좋게 내뿜어져나오는 에어컨의 쇳소리와 아저씨들의 호통같은 대화들을 비집고 노트를 펼쳐 옮겨 놓은 것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었다.


'모든 영혼의 진화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대. 공포.모색.사랑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말하고 있는 건 하나야. 이 세 단계는 하나의 생 또는 여러 개의 환생을 통해 진행될 수도 있지만 하루, 한 시간, 혹은 1분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어.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문장 앞에 모든 감정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있다라는 덧붙여 읽으면 좋아'


알쏭달쏭한 얼굴로 그는 미나리와 얇게 채썰린 배추 그리고 뻘건 국물에 둥둥 떠있는 핏줄처럼 갈라진 무늬의 표면을 가진 들깨의 씨앗들이 버무려진 것을 후후 불어 입안에 집어 넣고 우물우물했다.


반드시 청자의 적극성이 있어야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새겨듣기 위해 읽기도 한다. 그것을 다시 읽으며 힐끗 그의 표정을 살피기는 했으나 무엇을 보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소리내어 읽는 동안 내 안에서 들추어지는 것을 관망하기 위해서 읽는다. 그것은 사랑고백 같은 것이다.


오리탕을 후후 불고 우물거리는 그는 13년 전 극도의 공포 더듬으며 버티고 선 내 인생에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고작 2주 안의 일이었다. 나의 아빠는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애초에 죽음은 예견하지 못하는 한 순간이기는 하겠지마는, 갑자기 떠났다. 아빠가 떠나는 장면을 목격한 나는 발 딛고 있던 지반이 와르르 통째로 뒤흔들리며 조각나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발 딛고 서 있으나 바닥을 알수 없는 지면아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흝어지는 공포에 휩싸였다. 모색. 미국에 있던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 즈음 손 안에 쥐고 있던 몇 가지 선택의 고민에 마침점을 찍고 인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했다. 사랑. 장례를 치르고 하얗게 뜨고 텅 비어버린 얼굴로 서울 시내의 한 복판에서 그를 마주하고서야 울었다. 소리내어 울었다. 그는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했다.


인생은 결국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개척하는 듯한 착각 속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축적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만나는 몇 문장이 아침에 살벌하게 싸우고 냉랭하던 기운을 펄펄 끓어오르는 뚝배기의 화염에 날려버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 진한 국물같은 사랑고백을 남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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