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비움) 누다가 머리에 채워진 단상.
새벽 수련을 안내한 나를 건물이 뱉어냈다. 거리 한 중간에 내동댕이 쳐진 채 집에 가서 찌개를 끓일지, 카페로 갈지 설렁이는 마음이 갈피잡기까지 그리 길지 않았다. 관건은 이 시간에 오픈한 카페가 있을까. 검색해보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개업한 카페가 있다. 동시에 똥이 마려웠다. 카페 근처 공원의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면서 비워진 몸의 느낌이 이렇게나 가볍고 흔쾌할 일인가. 발걸음이 경쾌해지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이 비워져 나간 집의 여백에서 느끼는 해방감. 몸을 한 쪽으로 기울이는 측굴의 일환으로 반대쪽은 공간이 열리고 열린 공간으로 숨이 채워질 때의 몸의 감각 그리고 오래 전 굳이 한 시간을 운전해, 영화 <퍼팩트데이즈>의 마지막 상영을 붙잡아 보고 나오며 온 몸을 타고 흘러내리던 생각들이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었다.<도쿄 토일럿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리한 화장실에서 받는 영감으로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빔 벤더스 감독이 풀어낸 작업. 필요한 것을 취하고 불필요한 것을 비워내는 작업장이라고 생각하면 화장실이 특별해진다. ‘어차피 더러워질 화장실’을 매일 깨끗하게 닦고 치우는 일은 마치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옷을 빨아 말리고 개켜서 옷장에 집어넣고 어차피 똥이 될 음식을 때로는 정성스레 지어서 음미하고 때로는 대충 만들어 우겨넣는 일을 반복하는 것과 닮았다. 어차피 뱉고나면 흩어질 말을 다듬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어차피 내일이면 제자리일 것이 뻔한 뻑적지근할 몸을 늘리고 단단하게 뭉치고 하는 요가를 매일 반복하는 것과도.
그래서 새벽 비질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뜨고 망설임없이 번뜩 일어나 몸을 뉘었던 자리를 반듯이 개어 한 켠에 정리하고 거울앞에서 양치를 하고 집 앞 자판기가 동전을 삼키고 뱉어낸 캔 커피 하나를 들이키고, 작업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들을 오래된 카세트에서 노래를 선별하며 뜨는 해가 비추는 도시의 아침 풍경을 가로질러 일터로, 일터에서 집으로 목욕탕으로 항상 가는 지하의 식당에,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로 저녁을 먹고, 나무에 관한 책을 읽다 잠이 드는 영화 속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일상의 흐름 안에서 일종의 숭고함을 읽는다.
수련을 안내하는 입장에서 이 일을 애정하게 되는 순간들은 움직임 안에서 발현되는 찰나의 표정변화, 몸의 반응 차이를 발견할 때이고, 스크린에서 타인의 삶을 관음하듯이 마음 놓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가까이 붙은 것들은 일부로 보지 않으면 잘 읽히지 않는다. 한 발을 양 손으로 잡고 구르다가 일어나 앉는 몸의 전환이 일어난 순간 찰나의 멍함. 그런 요소가 발현이 되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것은 살맛나게 한다.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던 피부내막과 내막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숨이 마침내 벌려놓은 공간사이를 유영하듯이.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늘 붙잡고 있던 무엇인가를 놓고 온다. 적어도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은 팔의 연장과 같은 핸드폰을 놓아야 하고 움직임을 위한 최소한의 옷과 장신구를 남겨놓고 수련실에 입장한다.
간소화. <퍼펙트데이즈>의 한 장면중 아-하던 모먼트는 히라야마가 천장조명의 전구불빛에 의지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누워 책을 읽다가 피로해지는 순간 천장조명에서 전구를 분리해서 탁상조명으로 돌려끼워 누워 책을 읽다가 누운 상태로 손 뻗어 조명을 끄고 잠드는 장면. 우리 집에 너무 많은 조명들, 전자기기들이 일시에 거추장스러워 진다. 비워낼 것을 비워내고 최소한의 것을 혹은 필수불가결한 것을 남겨놓는 탁월한 선택의 질(quality)에 과해서라면 ‘집’이 놓인 자리에 ‘몸’을 대입해도 읽히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 요가는 매일 내게 붙은 불필요한 생각을, 꽉 다물고 있던 턱 관절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머리에 잔잔한 바람이 일 듯 시원해지는 것처럼 구겨놓은 몸을 펼쳐 여백을 살리는 작업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