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일
평소와 똑같이 시작된 평범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의 마음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조금 긴장되었고, 조금 슬펐다. 왜냐하면 오늘은 사랑하는 엄마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삼십여 년 전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동생은 5학년이었고, 우리의 세상이 무너진 건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여름방학이었다. 우리 가족은 매년 여름이 되면 바다로, 계곡으로 여행을 갔다. 가장 즐거웠던 우리의 여름은 가장 슬픈 날로 바뀌었고, 엄마가 떠난 후에는 가족여행도 끊겼다. 아빠마저 팔 년 전 세상을 떠났고, 2025년의 여름은 우리 두 자매가 각자의 가족과 함께 보스턴에서 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실 부모님 제사를 챙긴 건 십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고, 아빠는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가장은 아니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가 대신해 주셨는데 우리 집의 대장은 할머니였으므로 그냥 할머니가 하시는 대로 조용히 따랐다. 할머니는 엄마 제사를 할아버지 제사와 함께 지냈다. 기일이 이틀 간격이었는데 할아버지 제사를 먼저 지낸 후에 고인의 명패만 바꾸어서 엄마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의 강압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식구들이 수동적이어서 그랬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라도 제사를 지내면 되는 건 줄 알았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따로 엄마 제사를 챙기기 시작한 건 내가 결혼하고부터다.
내가 며느리가 되어보니 엄마의 제사 방식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그제야 보였다. 기일이 같은 것도 아니며 하물며 본인의 아버지도 아니고 시아버지 제사상에 엎쳐서 하는 제사라니. 물 한 바가지 떠다 놓고 절을 받더라도 얼마나 제날짜에 받고 싶었을까, 엄마의 넋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들이 아닌 딸인 덕에 제사에 대한 책임을 강요받지도 않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기리기 위해서 그때부터 매년 제사를 지냈다. 유교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도 아니었고, 떠난 조상의 영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의 엄마였기에, 일 년 중 단 하루라도 떠올려보고 싶기에,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라서, 그래서 아직은 엄마의 기일을 챙기고 제사를 올린다.
이번 보스턴 한달살이를 계획하면서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엄마의 기일을 챙기는 일이었다. 다행히 아빠의 기일은 한 달 뒤라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챙길 수 있었는데, 엄마의 기일이 여행 기간에 딱 걸려버린 것이다.
제사상 음식이라고 일컫는 탕국, 생선, 나물, 튀김, 전 같은 음식을 만든다. 지방을 써서 붙이고 초를 켜고 향을 태운다. 그게 그동안 해온 우리의 평범한 제사 방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냥 넘기기도 그렇고, 집에서 하던 대로 다 챙길 수도 없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이번 기일은 동생에게 맡겨야겠다고 결정했다.
내가 첫째이기도 했고, 마지막에 아빠가 살았던 곳이 우리 집이기도 해서 제사는 늘 내 몫이었다. 동생은 한국에 있을 때도 먼 곳에 살았고, 이제는 미국에 살다 보니 어느새 혼자 지내는 게 익숙했다. 기일도 명절도 매번 한국에서 혼자 챙기다가 처음으로 동생에게 맡긴 것이다. 여기는 너의 그라운드이니 너의 방식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챙겨보는 게 의미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여기서도 기존에 하던 것처럼 구색을 갖출 수는 있었다. 제사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고, 한자가 적힌 지방도 파일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까지 와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문득 보스턴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인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가 생각나서였다. 소설 속 가족들은 엄마의 기일을 기념하기 위해 엄마의 과거가 있던 하와이에 모였다. 그곳에서 엄마를 기억하며 각자가 구해온 음식과 사진, 경험과 추억을 한 상에 올려 기일을 챙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중요한 건 제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엄마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못다 한 사랑을 전하는 일이니까. 우리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추억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함께 차를 끌고 마트로 갔다. 가장 먼저 커다란 보스턴 초코케이크 하나를 샀고, 그다음엔 꽃 한 다발을 샀다. 미국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장을 보는 사람들의 카트에 대부분 꽃다발이나 화분이 하나씩은 있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기분 전환을 위해 꽃을 사기는 하지만 일상의 일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 꽃을 산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꽃은 친구이자 일상이었다. 가게 제일 앞 매대를 차지하고 있고, 오늘 먹을 신선한 식재료를 고르듯 오늘 사 갈 꽃을 열심히 골랐다. 방금 화원에서 뽑아온 듯 투박한 꽃들이었다. 내 눈엔 모조리 못난이 꽃이라 도저히 예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꽃을 고르는 사람들의 눈빛에선 사랑이 흘렀다. 우리는 신중에 신중을 더해 걔 중에 가장 예뻐 보이는 하얀 수국과 하얀 장미, 그리고 초록 잎들이 꽃들 주변을 둘러싼 꽃다발을 골랐다.
오늘 제사상 메뉴는 연어 초밥과 찹스테이크로 정했다. 엄마가 살아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는지 둘이 열심히 머리를 모아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되어 그럴 수도 있고, 부모에게 관심 가지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릴 때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엄마는 늘 자신보다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는 사람이었고 자기의 기호를 주장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엄마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 기회가 없었다. 가족들을 먼저 챙기는 게 엄마의 일이었고, 엄마의 선택이었고, 엄마의 행복이었겠지만, 이제 다 커서 엄마가 된 딸들은 본인의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모르는 못난이 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먹고 싶은 메뉴를 올리기로 했다. 딸들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게 엄마의 가장 큰 바람이었을 테니, 그 바람을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준비한 케이크와 꽃, 음식을 세팅하고 가족이 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동생이 대표로 엄마의 이야기를 하며 추모했다. 사위들도, 아이들도 비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장모님과 외할머니이지만, 분명한 우리의 가족이고 지금도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에 감사하고 그리운 마음으로 엄마를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색다른 도전은 뜻깊은 추억을 주었다.
엄마는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동생도 나도 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우리는 계속 늙어가는데 엄마는 젊음의 자리에 멈춰진 채 우리 기억 속에 남았다.
아직 엄마의 손이 필요한 어린 자매에게 세상의 전부이자 가장 소중한 존재인 엄마의 죽음이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감정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이었고, 그 슬픔은 우리의 삶 저변에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은 슬픔을 초대시키고 자신의 빈자리에 영원히 머물게 한다. 그래서 애도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미국에서 가졌던 우리의 특별한 애도를 기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