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는 잊힐 수밖에 없겠지만, 마음에서는 영원히

살면서 잊힌 것들에 대하여

by 밝음


벌써 25년 전이다.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를 직접 보고 들은 게 말이다. 중학교에 갓 입학하고 맞이했던 첫여름날, 엄마는 지구별 여행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천천히 가도 될 것을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일찍 우리를 떠나셨다. 지금은 3명 중 한 명이 암 환자라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주변 사람들 중에 우리밖에 없었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린 엄마. 그런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가 이젠 가물가물하다 못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쯤이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분명 수없이 내 이름을 불러주고,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도 어떤 목소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보냈던 장면들은 떠올랐지만, 오디오는 꺼진 오래된 영화필름 같았다.


사진을 보면 떠오를까 싶어 구태여 앨범을 뒤져보지만, 너무 오래되어버린 엄마와의 만남은 목소리는커녕 이제 얼굴조차도 너무 낯설었다. 사진 속 엄마의 나이가 이제 내 나이보다 더 어리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목소리가 잊히는 것도 아쉬운데 이젠 아빠의 목소리도 점점 옅어진다. 아빠는 6년 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살아 계실 때 입에 달고 다니시는 주문이 있었다. "나는 20년 되면 너희 엄마 만나러 갈 거다."라는 주문. 입으로 외던 그 주문은 아빠의 소원을 이루어주었고, 그렇게 아빠마저 우리 곁을 일찍 떠났다.


엄마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에 아빠의 부재는 더욱 큰 슬픔과 그리움을 안겨주었다. 기억하고 있어도 그리운 아빠라는 존재가 엄마를 따라 점점 흐려져가고 있다. 자주 하셨던 말들은 떠오르는데 이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귓속 플레이 버튼을 반복해서 눌러도 내 고막에서 아빠의 목소리는 재생되지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꾸 잊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장 그리운 게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다.


만날 수 있을 땐 나에게 어떻게 해주고, 나에게 어떻게 해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었다. 그런데 만날 수 없게 되자 오직 얼굴과 목소리가 그리웠다. 무엇을 해주어야 소중한 사람인 줄 알았던 가족들은 이미 존재 자체가 나에게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곁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얼굴을 볼 수 있고 함께 대화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충분한 대상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자꾸 잊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삶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사랑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기억된다면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면 과거에 사로잡혀 매일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테니까.


소중한 것들이 잊히는 것이 아쉽지만, 아픔과 고통도 잊힐 수 있어서 기억 속에 묻어두고 다시 힘내서 살아가는 삶이다. 언젠간 모두 잊어야 할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 기억될 뿐 결국 모두 잊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들이 잊힐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만나고 경험한 소중한 모든 기억들은 내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다.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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