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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ul 05. 2022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여름날의 기억

유년 시절의 기억 중 손상되지 않은 한 페이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언니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곧 출발이다. 차에는 이미 먹을 거리와 코펠, 담요 등 갖가지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 아빠는 시동을 걸고 엄마는 조수석에 올라타고, 언니와 나는 뒷자리를 차지한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갈 무렵, 우리 가족의 피서는 시작된다. 피서지는 늘 같았다. 동해. 바다를 좋아하는 아빠는 늘 묻지도 않고 홀로 행선지를 정했다. 물만 보면 일단 뛰어드는 나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캄캄한 밤에 출발을 하면 엄마와 언니는 이내 단잠에 빠져 들었다. 좁은 차 안에서 깨어있는 건 늘 아빠와 나 둘뿐이었다. 일 년에 딱 한번 여름이면 어김없이 떠나는 여행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잠은 좀체 오지 않았다. 고속도로가 뚫리기도 전 강원도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고 또 넘으면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날 동해에는 쨍한 불빛을 켜둔 오징어잡이배가 늘어서 있다. 그 불빛을 등대 삼아 동으로 동으로 다가가면 동이 터올 무렵 우리 네 식구는 마침내 동해에 도착했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는 텐트를 치고 엄마는 아침밥을 지었다. 언니와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첨벙거렸다. 밥이 다 됐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차림으로 텐트 곁으로 와서 모래밭에 털썩 앉아 밥을 먹고, 또 다시 물로 향했다. 그렇게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그 시절의 나였다.


여행객들을 위한 민박집이 따로 있다는 것도,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나는 스물 언저리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각종 캠핑 장비를 챙겨 넣은 차를 타고, 오늘은 이 바다에 내일은 저 계곡에 머물며 일정 없이 떠도는 피서를 남들도 다 하며 사는 줄로만 알았던 것. 그렇게 매년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일주일에서 열흘쯤을 정처없이 떠돌았다.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과의 추억 중 가장 손상되지 않은 기억의 한 페이지다.


여행지에서 몇 날 며칠 텐트를 치고 밥을 하는 게 무척 고된 일임에도 왜 그렇게 다녔는지를 생각해보면, 돈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 그리고 매일 시집살이와 밥벌이, 살림과 육아 등을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엄마의 삶에서 네 식구만의 단란함은 일 년에 한번만 누릴 수 있는 그녀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워낙 한량끼 가득한 아빠에게는 바다와 산을 떠돌며 언제든 들이킬 수 있는 한 잔의 술이 달콤했겠지. 일 년 중 유일하게 부모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 늘 화가 나있던 엄마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내게는 여름이었다.


언니가 중학생이 된 이후였을까, 내가 중학생이 된 무렵이었을까. 우리 가족은 더 이상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신도시로 이사를 하고 자영업을 시작하며 누구보다 바쁜 시절을 보냈고, 언니와 나도 더 이상 부모와의 여행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청소년이 되어간 것. 유년시절의 기억은 내게 늘 아프기만 한데, 그럼에도 애써 더듬어보면 아련한 행복의 날들이 성기게 박혀있다. 그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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