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에서 길어 올린 청춘의 기억들
캄캄할 때 귀가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해가 있을 때 집에 돌아가는 게 금기라도 된다는 듯 당연히 약속을 잡고 으레 누군가를 만났던 시간들. 도시의 밤은 늘 분주했다. 네온사인은 반짝이고 거리는 소란했다. 누군가는 크게 웃고 누군가는 목놓아 우는 도시의 밤. 그 어지러운 밤이 이따금 그리웠다.
친구와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의 사랑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낯선 이들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기대를 안은 채 술을 마시고, 고막을 터뜨릴 듯 흐르는 음악에 취해 흘러가듯 몸을 흔들며 탕진한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도시의 밤거리를 누비다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던 길은 유독 공허했다. 깊은 숨을 검은 공기 속으로 내뿜을 수 있는, 요동치는 몽글몽글한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밤공기를 가르며 하루를 닫았던 청춘의 시간들.
오랜만에 서울의 밤을 걸었다. 십 년만인가. 여전히 밤거리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넘치고 만남을 반기고 작별을 아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짝이는 거리들을 가만가만 눈에 담으며 방황으로 점철된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화려했지만 텅 비어 있었던 그때의 나. 결국 남루해도 내면을 채우고자 길을 떠났던 경계선상의 나까지.
이십 대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다양한 음악을 듣지 않은 걸 이따금 후회하곤 했는데, 밤길을 걷다 보니 그 시절의 방황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짝였다는 걸 깨닫는다. 후회 집착 방황 분노에도 그저 존재 자체로 빛나는 것, 그런 게 청춘인 걸까. 늘 아팠던 기억이 선명해 떠올리지도 않으려 발버둥 쳐왔는데, 청춘은 결코 푸르지 않다며 그 시절의 미숙한 나를 학대하곤 했는데. 시간은 기억을 왜곡하는 걸까, 체로 걸러 굵고 오롯한 입자들만 남기는 걸까. 왜 나는 이제와 내 청춘을 아름답다고 말할까.
내가 사는 섬의 밤은 고요하다. 일곱 시만 넘어도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가게 문은 빨리 닫히고 사람들은 일찍 귀가해 거리 대신 집을 환하게 밝힌다. 섬에 온 뒤로는 어두워지면 집에 머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살아왔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더더욱 아이들의 이른 취침 시간에 맞춰 모든 일상을 맞춰갔다. 도시의 밤은 그렇게 내게서 서서히 잊혀갔다. 아팠던 기억도 찬란한 추억도 모두 어딘가에 묻어두고 그렇게 오늘만을 살았다.
그러다 도시의 밤을 만났다. 내가 만난 건 단지 도시의 꺼지지 않는 불빛이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꺼질 수 없는 흔들리는 청춘의 민낯인지도 모르겠다. 그 흔들림도 보듬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걸까, 기억이 왜곡돼 아름다움만 걸러진 탓일까. 청춘이 내 안에서 푸르게 되살아난다. 작은 상처에도 진저리를 쳤던, 모든 게 흐릿하기만 했던, 그럼에도 지치지 않았던 시간들 속의 나를 끄집어내 어루만져주고 싶다. 흔들리지만 뿌리째 뽑히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 시절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방황하고 그렇게 아파했기에 지금의 단단한 내가 되었다고. 나는 도시의 밤으로 각인된 그 시절의 나를 와락 껴안는다.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