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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23. 2022

깊고 깊은 쓸쓸함에 대해

한때 점보기를 무척 좋아했던 나. 툭하면 친구들과 타로 점이나 사주를 봐주는 카페에 놀러가곤 했다. 이십대였으니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곤 했는데 직접 물을 수 없는 상대방의 마음 같은 것을 자주 묻곤 했다. 그보다 더 자주 물은 게 있다면 내 자신에 대한 것.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보려 하지 않고, 사주 풀이에 기대 내 자신을 알아보려 꽤 애를 썼다. 다가오지 않은 앞날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내가 점보기를 완전히 끊은 건, 십수 년 전이다. 마지막으로 본 건 깊은 나락에 빠져있을 때였다. 신기하게도 점을 봐주는 사람은 내가 막연히 꿈꾸던 미래를 줄줄 읊었다. 그때 나는 해외에서 자리를 잡고 싶었지만 결코 떠날 수 없을 때였는데, 해외에 나가야 잘 살 팔자라고 했다. 조목조목 짚어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내 속을 그대로 들여다본 것만 같아 놀라웠다. 그날 점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결코 할 수 없는 걸 해야만 잘 산다니. 이보다 더 가혹한 게 있을까 싶어 스스로 처한 상황을 원망하며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점을 보지 않았다.


내 안의 중심이 잡히지 않았을 때 점을 본다는 게 얼마나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너무 깨달아버린 것. 그나마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였기에 점괘에 흔들릴 수조차 없었지만, 만일 선택이 가능한 점괘가 나왔다면 심지가 곧게 잡히지 않은 나는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들여다봐야 하는 건 사주가 아니라, 내 자신임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점은 이제 보지 않지만, 이전 경험에서 뇌리에 각인된 두 문장이 있다. 죽을 때까지 책을 놓지 못해요. 책을 좋아했지만 꾸준히 읽지는 않았던 때였고, 글 쓰는 삶을 살겠다 다짐했을 때도 아니어서 더 신기하게 여겨졌던 말이다. 또 하나는 이 문장이다. 수만 명의 군중이 모인 곳에서도 외로움을 느낄 팔자예요.


늘 내 안에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른 우물이 있다고 느낀다. 어떤 순간 약간 찰랑일 때도 있지만 금세 또 바닥을 드러내는 허기짐. 그 공허함과 깊은 쓸쓸함을 나는 자주 마주한다. 처음에는 그 나락에서 그저 허둥대기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랑으로 어떻게든 채워보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도 다 채울 수 없는 쓸쓸함이 내 안에 늘 존재했다.


이제 나는 그 감정 역시 나의 일부로 인식한다. 또 찾아왔다며 익숙하게 감정을 받아들인다. 그럴 때면 되도록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가만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런 나를 채울 수 있는 건 결국 나뿐이라는 걸 되새기며 그렇게 내게 집중한다. 그런 연습을 오래 반복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 공허함을 조금 즐기게 됐다. 정말 그런 사주인가보다 자조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가거나 글을 쓰면서.


어딘가에는 그저 행복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게 타고난 기질 때문이든 자라온 환경 때문이든 개개인의 노력 때문이든, 분명 좋은 걸 먼저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와는 반대되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 윤회를 믿지 않지만 혹여 또 태어난다면 그렇게도 살아보고 싶다. 내 안에 넘치는 행복을 타인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면서.


지인이 가파도 청보리밭에서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왔다. 조금씩 노란빛을 띠어가는 청보리가 바람에 살랑이고 햇살에 반짝이는 황홀한 풍경을 가만가만 눈에 담으면서 나는 못내 쓸쓸했다.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은 때로 깊은 공허가 된다.


화려한 꽃보다 청보리나 억새를 좋아한다. 딱 한 송이만 피어나도 시선을 사로잡는 장미나 튤립보다 수많은 줄기들이 모여 군집을 이루고 바람에 하염없이 나부끼는 억새나 청보리가 더 내 마음을 사로 잡는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쉽게 몸이 흔들리지만 결코 뿌리째 뽑히지는 않는 그 연약한 강인함이 늘 내 감성을 건드린다. 그리고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김수영의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아무도 없는 청보리밭 한가운데 홀로 선 나를 떠올린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때 바람처럼 떠돌다 그저 공기 속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던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본다. 그럼에도 흩어지지 않고 다시 살아낸 나를 토닥인다. 어떤 모습이든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임을 잊지 않겠다고 되뇐다. 그렇게 오늘도 내게 찾아온 깊은 쓸쓸함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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