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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un 04. 2022

단순노동을 사랑한다

작은 마당이 있다. 넓진 않지만, 9년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잔디가 봄이면 다시 푸릇해지는 곳. 잔디는 좀체 고르게 자라지 않는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잎은 길쭉하게 자라고, 햇빛이 잘 들고 사람이 자주 밟는 가운데일수록 짧게만 돋아난다. 날씨가 풀려 처음 푸른 빛이 돌기 시작하면 열심히 물을 주고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이런 마음도 잠시, 봄이 깊어지면 이제 좀 그만 자랐으면 싶다. 너무 길게 들쭉날쭉 자란 잔디는 되려 지저분해 보이니까. 그러면 가위를 들고 가장자리 잔디를 다듬어야 한다. 넓지 않은 마당이라 예초기를 돌리기도 애매하니 쪼그려 앉아 깎을 수밖에. 할 때는 꽤 고되지만, 일정한 길이로 다듬어진 잔디밭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한결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비가 오면 땅은 수분을 흠뻑 머금어 평소보다 훨씬 무른 상태가 된다. 이런 날에는 잡초를 뽑는 게 좋다. 줄기 아래 부분을 살살 흔들다 조금 힘을 주어 당기면 뿌리까지 깨끗하게 뽑혀 나온다. 땅이 굳기 전이라 뿌리는 적은 힘으로도 쉽게 뽑을 수 있다. 이 때를 놓치면 땅은 금세 단단해져 훨씬 많은 수고를 들여야 잡초를 뽑을 수 있다. 그러니 비가 온 다음날은 마음이 분주하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 발을 옮겨가며 잔디 중간중간 돋아난 이름 모를 풀들을 뽑아낸다.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하나의 의미있는 풀이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단순노동을 사랑한다. 잡초를 뽑고, 잔디를 다듬고, 흙을 고르는 일들. 시골에 내려와 처음 이런 일들을 할 때는 귀찮게만 느껴졌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금세 쑥쑥 자라나는 식물의 성장 속도가 익숙지 않았다. 몇 년 전 머리가 너무 복잡하던 어느 날, 잡초 하나에 시선이 꽂혀 갑자기 쪼그려앉아 풀을 고른 적이 있다. 한참 그렇게 땅만 바라보며 잡초를 뽑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러는 동안 머리를 헝크러 놓았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흙내음을 맡으며 풀에만 집중한 시간 동안 내 머리는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 경험 이후 나는 흙의 힘을 믿게 됐다.


내가 하는 카페 일도 사실 단순노동에 가깝다. 주문을 받고 메뉴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지극히 단순하다. 사람을 마주하는 건 단순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기본적인 카페 관련 일은 분명 단순노동이다. 내가 카페 일을 사랑하는 건 바로 이 단순함 때문이다. 간결한 만큼 결과가 빨리 나오고 성취감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한때 나는 단순노동을 무시했다. 창의적이지 않은 단순한 행동의 반복이 나의 학벌이나 경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 특출나지도 않고 남들 다 가는 대학을 나왔을 뿐인데도 그랬다.


스물다섯,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잠깐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낯선 사람들을 대하고 예약관리를 하고, 테이블을 배치하고, 접시를 치우는 일들. 눈과 손이 빠른 편인 내게 잘 맞는 일이었다. 사장 눈에 띄어 금세 프론트에 배치를 받고, 괜찮은 월급을 받았다. 사장은 여행을 가지 말고 정직원으로 일하라고 제안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단순노동에 내 미래를 걸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노동에 차등을 두었던 부끄러운 시절의 기억이다.


카페 일을 하고, 잡초를 뽑으면서 나는 이따금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여기저기 취업에 실패한 뒤 나는 더이상 이력서를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제일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은 끝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그 무엇보다 갈망하고 있었다. 그 여행을 가겠다며 취업도 뒤로 미루고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던 것. 일은 고됐지만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계속되는 낙방으로 의기소침해진 스스로를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여행 경비를 모으는 것 이상의 성과를 얻은 셈이다.


단순노동을 한다고 사람마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노동이 단순하다 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못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때 단순노동을,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겉으로는 무시하지 않는 척 했지만, 속으로 나는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선을 그었던 것. 그 시절의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단순노동으로 머리를 정화하는 경험을 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편협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여전히 사람들은 언어로 시선으로 노동의 경중을 가른다. 단순할수록, 연봉이 낮을수록 무시받는 직업들. 겉으로는 짐짓 괜찮은 척 해도 속으로는 깔보는 시선들. 개발직은 생산직을 무시하고, 소프트웨어 분야는 하드웨어 분야를 무시한다. 타인은 몰라도 나와 내 자식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믿는 굴곡된 시선들은 여전히 도시를 지배한다. 도시의 삶은 계층의 삶이기도 한 것.


도시의 삶을 거부하고 시골에 내려와 살다보니 가장 부러운 건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방인처럼 살다 보니 어디를 가서 살더라도 자신의 기술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도배, 타일, 목수, 미용 등.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은 어느 곳으로 이주를 하더라도 먹고 살 길이 있었다. 반면 사무실에만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글의 삶에서 칼라의 색은 무의미했던 것.


그림을 그리다 청소일을 시작한 사람, 대기업을 그만 두고 도배를 시작한 사람 등. 버젓한 학벌이나 경력을 뒤로 하고 단순 노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희망을 마주한다. 단순히 돈을 더 벌어서가 아니라, 학벌이나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의 만족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에서 학벌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는 작은 씨앗을 발견하곤 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부단한 생각과 연습이 필요하다. 내 스스로가 단단해져야 비로소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로 당당히 설 수 있다. 그런 내가 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인간을 옭아매는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자유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진정한 자유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정원은 사람을 닮는다고 한다. 정원이 정리되어 있을수록 그 정원을 가꾸는 사람의 삶도 정리되어 있는 것. 돌이켜보면 내 삶을 거부하던 시절의 나는 눈에 거슬리는 잡초 하나 뽑아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길고 짧은 잔디의 길이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내 삶을 거부하지 않고 온 몸으로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내 작은 정원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다듬듯 나의 정원도 다듬어 나갔다.


오늘도 이렇게 단순노동을 하며 자연으로부터 힘을 받아 글을 써내려 간다. 단 한번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 하늘과 계절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바람과 재잘대는 새들을 온 몸의 감각을 이용해 느끼다보면, 모든 상념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지금 이 순간의 자연을 고스란히 느끼는 오롯한 나만이 남는다. 단순하기에 더 자주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복잡한 세상을 간결하게 정리해주는, 단순 노동을 예찬한다. 오늘도 덕분에 복잡한 머릿 속을 깨끗이 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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