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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ug 03. 2022

당신의 음식에 담긴 의미

어머니들에게 음식은 곧 자신이었다

얼마 전 한 친구와 톡을 주고받다가 친구가 마침 엄마의 음식을 먹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근 직장일로 크게 힘들어하던 친구였는데, 친구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크게 힐링이 된다는 말을 했다. 그 톡을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한참 들여다본 뒤 짧게 대꾸를 했다. "나한테도 그래." 문자를 보내고 나서 돌이켜보니 엄마의 음식을 먹은 지 무척 오래 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친구는 조금 뒤 답을 보내왔다. "어머니가 상처와 짐이 아니라 너한테도 따뜻하고 힘이 되면 좋겠다." 나는 이 문자를 받고 오래 답을 보내지 못했다. 눈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최근에 부모님이 내게 크게 잘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났다. 부모로부터 그 시간 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부모가 내게 전한 많은 말들 중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는지를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나는 온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당분간 연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저 대화는 내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친구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 말이 참 따뜻해서 울었고, 엄마의 음식이 새삼 생생하게 떠올라 나는 두번 울었다.


음식이라는 건 그렇다. 아무리 화가 나 연을 끊더라도 문득 입안에 떠오르는 그리운 맛이 곧 음식인 것. 아무리 엄마와 연락을 하지 않는 중이지만 내게도 엄마하면 떠오르는 음식들이 있다. 동태찌개, 소갈비찜, 된장찌개, 곱창전골 등 모두 엄마만이 낼 수 있는 맛이 담긴 음식들이다. 그 음식들이 나도 이따금 그립다. 임신을 했을 때는 더욱 그랬는데 그런데도 나는 엄마에게 단 한번도 음식을 해달라고 조른 적이 없다.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는 딸로 평생 살다보니 임신을 했어도 마찬가지였던 것. 엄마의 음식은 그저 기회가 닿으면 한번씩 먹을 뿐이다. 연세가 들수록 엄마의 음식도 간이 점점 세지고 조금씩 맛이 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엄마만이 내는 맛의 결은 여전하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그 맛으로 엄마를, 엄마의 사랑을 조금 실감한다.


결혼을 하고 시어머니의 음식을 맛보면서 나는 또 다른 음식의 맛에 길들여져 갔다. 시어머니의 손맛은 엄마의 손맛과 제법 흡사했다. 그리고 몇몇 음식은 오히려 엄마가 한 것보다 나았다. 엄마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께 친정 엄마가 해주신 것보다 더 맛있다는 말을 했다. 엄마에게는 좀체 하지 못하는 말을 시어머니께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잘도 한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시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으신 듯하다. 시댁도 친정만큼이나 거리가 멀어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한번씩 가면 나는 평소보다 훨씬 밥을 많이 먹는다. 처음에는 평소 먹는만큼만 밥을 푸지만, 이내 밥을 더 덜어서 먹는다. 어머니가 텃밭에서 직접 키운 푸성귀를 손맛으로 버무려주시면 밥 한 그릇은 뚝딱이다. 시어머니는 이따금 보내주시는 택배에도 그런 음식과 식재료들을 넣어주신다. 나는 친정엄마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시어머니를 통해 받는지도 모른다.


'삼시세끼를 차리는 마음에 대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에서 어머니 세대가 왜 그토록 음식을 만들고, 오래 식재료를 다듬는데 열심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별로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여전히 삼시세끼를 차리는 그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도 했다. 직접 묻진 않았지만 나는 오래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리고 친구의 따뜻한 문자를 받은 뒤에야, 음식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써보겠다고 자리에 앉은 뒤에야 나는 어렴풋이 그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들에게 음식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게 아닐까.


오랜 세월동안 결혼을 한 여자가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였다. 좋은 엄마와 아내가 되는 것. 그녀들에게 새로운 꿈은 허락되지 않았다. 음식을 하고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여자로서, 여자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살림은 티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결국 제자리인 게 살림이다. 육아도 크게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사람이 잘 자라는 건 엄마의 손에만 달린 일이 아니기에,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타일러도 자식 농사를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성공의 정의가 모호하기도 하고. 하지만 음식은 다르다. 재료를 알고 손맛을 익혀서 식구들에게 제공하는 건 그 어떤 일보다도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손맛에 가족들이 길들여진다면 엄마의 자리는 더욱 굳건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쉽게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시대임에도 어머니들이 여전히 지난한 음식의 과정을 감내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라도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자신이 지켜온 자리를 인정받고 싶었으리라. 음식은 그렇게 엄마들의, 결혼한 여자들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단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부부싸움을 하고도, 이 놈의 음식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어머니들은 삼시세끼를 차린다. 어머니들에게 음식은 곧 자신이었다. 음식의 맛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가치와 비례한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어머니들에게 음식은 자존심이고 끝까지 놓지 못하는 유일한 의미였으리라.


시어머니가 얼마 전 보내주신 장아찌와 한아름 따서 보내신 자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이 크신 분이라 늘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음식은 양이 많다. 입이 짧은 네 식구가 제때 헤치우지 못해 상한 걸 버리거나 이웃에게 나눠줄 때도 종종 있다. 전화를 할 때면 너무 많이 보내주셨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곤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날의 나를 반성한다. 음식은 어머니 자신의 존재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보내주시는 음식들이 상하기 전에, 더 맛있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글을 쓰며 새삼 깨닫는다. 어머니들의 짓눌린 지난 삶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는 걸. 어떻게든 증언하고자 했던 어머니들의 시간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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