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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16. 2022

가난을 선택한 삶

돈을 부러 멀리 해온 삶을 반추한다

얼마 전 남편의 면접 날이었다. 남편은 십 년 전 결혼 때 장만한 양복을 오랜만에 꺼내 입었다. 섬마을 시골로 이주해 살다 보니 딱히 지인들 경조사에 갈 일이 없어 아이들 돌잔치 외에는 꺼내 입지 않은 양복이었다. 섬이다 보니 습도가 높아 옷에 자주 곰팡이가 스는데 다행히 양복의 상태는 양호했다. 말아서 보관해둔 벨트를 오랜만에 꺼내니 툭툭 가죽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외관상 딱히 문제는 없어 보여 허리에 감고 남편은 그렇게 집을 나섰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신발 역시 곰팡이가 자주 나서 한 번씩 대대적으로 숙청하듯 갖다 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남편에게 남은 구두는 십 년 전 결혼 때 장만한 딱 한 켤레뿐이었다. 결혼해 십 년 동안 열 번도 신지 않은 구두였다. 구두는 말짱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신으니 뒷굽이 바스러졌다. 오랜 시간 습기를 머금고 있으면서 강도가 약해진 것. 남편이 걸을 때마다 뒷굽에서 검은 가루가 뚝뚝 떨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면접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주변에 마땅히 구두를 살만한 곳도 없어 남편은 다 낡은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남편은 언제부턴가 미용실을 가지 않는다. 집에 있는 이발기로 직접 머리를 자른다. 자영업을 시작하고 머리 스타일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스스로 이발을 하기 시작했다. 숱도 많이 적어져 남편의 머리는 점점 짧아진다. 스님 같은 머리 스타일의 남편이 바스러지는 구두를 신고 면접을 보러 가는 걸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처럼 수도권에 살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겠지. 남편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검은 가루들이 떨어져 민망했다는 다소 코미디 같은 면접 후기를 전했다.


섬에 살면서 한 번씩 지인들이 찾아오면 으레 집안을 둘러보고 간다. 그럴 때마다 집안 살림은 여지없이 공개된다. 쾌적한 삼십 평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지인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자연스레 비교가 되리라는 걸 잘 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살림살이와 시골의 집 한 채. 그게 내가 가진 전부다. 섬에 산다는 이유로, 집과 가게가 가깝다는 이유로,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 나의 살림은 자주 타인에게 공개된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잡는 것뿐.


나는 한때 중산층의 딸이었다. 스물셋의 나이에 자차가 생겼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동네의 커다란 아파트에 살았다. 돈돈 하던 엄마는 부동산 보는 눈이 남달랐고 집안 형편은 점점 나아졌다. 나는 그저 그런 부모에게 얹혀살았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나를 달리 바라봤다. 소개팅을 하면 강남 토박이들이 나왔고 누구든 나를 데려갈 거라 농담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처음에는 은근 즐기기도 했던 그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부모의 지인들은 대놓고 시기를 했다. 형제자매도 다르지 않았다. 조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때마다 아빠의 형제들은 한 푼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부모님은 조부모님을 평생 모셨다. 아빠의 형제들은 조부모가 수십년 전 함께 살 집을 마련할 때 보탠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엄마가 번 돈으로 장가를 든 사람들이었다. 결혼 후에도 여러 번 엄마에게 돈을 뜯어간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은 못 이기는 척 모든 장례 비용을 자신들의 돈으로 치렀다. 돈 앞에서 인간성을 버리는 어른들을 보며 나는 절대 부모의 돈을 탐하지 않을 것이라, 언니가 나보다 잘 살더라도 시기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을 했다.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던 때는 내게 가장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엄마는 일을 그만두면서 나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을 넘어 알코올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널따란 아파트에는 늘 술 냄새와 신세한탄만이 가득했다. 집 밖을 나가면 모두들 나를 부러워했고 집 안에만 들어서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가난하더라도 행복한 집에서 살고 싶다 생각한 게. 돈 따위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 여긴 게.


남편과 결혼을 결정하면서 나는 남편의 대학이나 연봉을 묻지 않았다. 남편의 집은 서민 중의 서민이었고 우리는 간신히 가진 돈으로 전세를 마련해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식장도 집 근처 자리가 남는 아무 곳이나 대충 잡아 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의 수준으로 집안의 부를 가늠하는 결혼문화가 싫었다. 그 시절 주례사에는 학벌과 직장이 당연하게 들어가곤 했는데, 그것도 모두 빼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살림살이는 오합지졸이었다. 남편이 혼자 쓰던 물건과 내가 자취하며 쓰던 물건에 새로 산 몇 가지가 합쳐져 있었다. 구색이라곤 없었다. 있는 물건은 굳이 사지 않았고 없는 것 중에 꼭 필요한 것만 사서 집안에 들였다. 결혼한 지 어느덧 십 년, 우리 집에는 엄마가 쓰다가 내 자취방으로 보낸 삼십 년은 족히 넘었을 낡은 국자도 아직 남아있다.


이따금 나는 가난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들으면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시절 나는 그랬다. 서로의 부를 전시하고 시기하면서 연신 입방아에 올리는 사람들 틈에 있는  너무 버거웠다. 아이의 학교는   학군으로 보내야 하고,  나이쯤 되면 어떤 차를 끌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수도권에 산다고 모두가 런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비교적 많은 곳에 있었고 그걸  견디지 못했다. 섬으로   물리적인 거리를 둠으로써 그런 사회로부터 떨어지고자   의지이기도 했다.


많이 가진 적이 있기에 내려놓을  있었다는  안다. 어떻게든 내가 부모를 부양해야 했다면 나만의 삶을 선택할  없었다는 것도  안다. 재테크에 부러 관심을 두지 않고  년을 살았다. 돈을 좇고 싶지 않았다. 자영업을 하다 보니 매달 같은 금액을 저축할  없어 돈은 남으면 남는 대로 따로 떼어내 보관한다. 돈은 불기도 하지만 비수기를 지나며 사라질 때가  많다. 빚이  늘어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긴  오래다. 남에게 손만 내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글을 쓰다 알게   지인은 중산층이다. 적은 돈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투자하며 많은 자산을 갖게  분이었다.  분은 누구보다 흥미를 갖고 투자하지만, 언제든 잃을 수도 있다며 돈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익의 일부를 꾸준히 기부한다.  모습을 보면서 결혼  나의  년을 돌아보게 됐다.  없이   없지만 돈에 집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커서, 의도적으로 불리는 일에 손조차 대지 않고 살아온  년이었다. 대신 씀씀이를 줄였다.  필요한 것에만 지갑을 열었고 삶의 거품을 최대한 걷어냈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다는  안다. 아이들이 점점 크고 있다는 것도. 돈을 너무 좇는 삶도 옳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너무 외면하는  또한 언젠가 고통이   있다. 아이들은 내가 선택한 삶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엄마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부정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걸림돌은 되지 않는 부모가 되려면 이제 나도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  아닐까. 가난을 선택했던 지난 삶을 반추하며  숙제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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