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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Feb 20. 2022

삼시세끼를 차리는 마음에 대해

며칠 전 시어머니가 택배를 보내오셨다. 오랜 시간 가마솥에 우려낸 곰국을 얼린 것과 손질된 국물용 멸치가 잔뜩 담겨져 있었다.


“내가 머리 따고 똥 빼내고 다 한 거다. 말리지는 못했으니까 자기 전에 보일러 들어오는 데에 깨끗한 달력 깔고 멸치 죽 널어놔라. 그럼 하룻밤이면 다 마를 거야. 안 말리면 비리다.”


나는 그날 저녁 부엌 한쪽에 쓰지 않은 달력을 찢어 넓게 깔고 어머니 말씀대로 멸치를 널었다. 아이들이 코를 막고 한 마디씩 했다. 멸치 냄새가 너무 지독해. 이걸 왜 널어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방문을 여니 온 집안에 멸치 냄새가 배어있었다. 밤새 바짝 마른 멸치를 봉지에 주워담으면서 어린 시절 툭 하면 음식을 하던 우리집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맏이였다. 고조부모에 증조부모까지, 일년에 지내는 제사만 명절까지 합쳐 여섯번을 넘어가는 집, 그게 우리집이었다. 잊을만 하면 제사음식을 만들었다. 탕을 끓이고 전을 부치고 산적을 구웠다. 거의 엄마의 일이었지만 자라는 내내 곁에서 보고 또 보아온 나의 경험이기도 했다.


꼭 제사가 아니더라도 우리집은 일년 내내 음식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설에는 직접 쌀을 맡겨 뽑아온 가래떡을 살짝 말려 가늘게 썰었고, 추석에도 색깔별로 뽑은 반죽에 콩이며 밤을 넣어 송편을 손수 빚어 솔잎을 깔고 쪄냈다. 김장을 할 때면 고약한 냄새를 풍겨가며 멸치액젓을 직접 내리고 배추를 소금에 절여 양념에 버무렸다. 메주를 빚을 때가 되면 엄마는 불 앞에 서서 내내 콩을 저었고, 할머니는 그렇게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힘껏 빻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언니와 나는 콩이 어느 정도 부서지면 그걸 한 데 모아 네모 모양으로 빚어냈다. 그렇게 만들어낸 메주를 몇 날 며칠 방 아랫목에서 곰팡이를 피운 뒤 햇볕이 드는 창가에서 바짝 말렸다. 그 메주를 항아리에 넣고 엄마는 직접 장을 담갔다.


할머니는 냉동실에 만두가 떨어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달에 한 번 이상은 할머니와 엄마, 언니와 내가 거실에 모여 앉아 만두를 빚었다. 할머니는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들고 비닐이나 젖은 천으로 잘 덮어두었다. 그렇게 얼마간 숙성된 반죽을 꺼내어 길쭉한 방망이 모양으로 늘어뜨리고 일정한 크기로 칼질을 한다. 그 작은 반죽을 언니랑 내가 꾹꾹 눌러 둥글게 펴놓으면 할머니는 밀가루 잔뜩 뿌린 도마 위에 놓고 둥글게 밀대로 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만두피를 고사리 손에 올려두고 엄마가 내온 소를 숟가락으로 야무지게 퍼넣고 반으로 오므린다. 그리곤 가장자리를 꾹꾹 누른 뒤 양 끝을 둥글게 말아 꾹 눌러 붙이면 완성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만두 궁둥이를 밀가루에 한번 쿡 찔러 쟁반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한 쟁반 두 쟁반 만들어내면 엄마는 그걸 또 가져다가 커다란 찜통에 차례차례 쪄냈다.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내게는 차고 넘쳤던 이 경험이 남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경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들은 힘들게 배우는 요리가 나는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대충 간을 하고 적당히 따라해도 음식은 제법 맛이 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오래 할머니와 엄마 곁에서 눈과 손으로 배운 덕에 요리는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음식하는 걸 보고 배웠는데도 나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 결혼을 하고 주기적으로 밥을 하기 시작하면서 요리가 어렵지 않았던 나는 내가 요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요리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고, 모든 삼시세끼는 내 손이 닿아야만 했다. 그런 생활을 몇 년 지속하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요리를 즐기지 않는다는 걸.


요리도 요리지만 식재료를 준비하는 오랜 정성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팩을 사다 국물을 내면 되는데 왜 굳이 통멸치를 사서 손질을 해야 하는지, 팩에 든 곰국을 사다가 하나씩 녹여먹으면 되는데 왜 불 앞에서 오랫동안 물을 더해가며 끓여야 하는지, 깐마늘을 사면 되는데 왜 굳이 통마늘을 잔뜩 사서 손끝이 아리도록 직접 까야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집 여자들이 치렀던 그 노고에 비해 할아버지와 아빠의 반응은 늘 미지근했다. 뭘 차려내라는 말뿐이었지, 함께 하자는 말은 없었다. 결혼을 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버지는 밥상에 감사해하지 않았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여자의 노동은 당연했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만일 조금이라도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시어머니의 정성스런 손길을 따라하는 어른으로 자랐을까. 정성껏 준비하는 손길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런 손길이 들어간 음식이 얼마나 더 맛이 있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많은 시간을 요리에 투자하는 게 아깝다. 매번 밥상을 차릴 때마다 메뉴를 고르지 못해 괴롭다. 따뜻한 한 끼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인 걸까.


이따금 어릴 적 분주히 음식을 만들던 우리집을 떠올린다. 내게는 따뜻한 기억이지만, 그 시간을 책임졌던 엄마에게는 분명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일을 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면서, 그 많은 음식까지 해야 했다. 엄마 나이 고작 삼사십대였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웃는 모습을 좀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철인인 줄 알았다. 내가 애늙은이가 된 건 엄마가 지닌 무게를 어릴 때부터 가까이에서 봐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빨리 어른스러워져야만 엄마를 편하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런 엄마도 여전히 음식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나서 예전보다 많이 줄긴 했지만, 가끔 만두를 빚고 매년 김장을 한다. 이제 더 이상 메주는 쑤지 않지만 시중에 파는 좋은 메주를 사다 장을 담근다. 엄마는 음식하는 게 이젠 정말 지겹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긴 시간을 감내하며 지난한 요리에 뛰어든다.


엄마와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궁금하다. 세대가 달라서일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손으로 하는 게 당연한 세대이기에, 관성의 법칙처럼 여전히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걸까. 그런 세대라 하더라도 그분들이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 시간들이 나는 못내 아깝다. 그 시간들을 좀 더 자신을 위해 썼다면 그분들의 인생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는 음식에 대해 아무리 글을 써도 결국 요리를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 안의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그토록 꼬여버린 걸까. 우리 아이들은 훌쩍 자란 뒤 엄마의 밥상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기억이 희생은 못되더라도 사랑은 될 수 있을까. 정성을 다한 소박한 밥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나는 지금이라도 윗세대들처럼 음식에 기꺼이 시간을 내야하는 건 아닐까.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평생 밥상을 차려야 한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삼시세끼를 차려야 할까. 그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수십년 동안 삼시세끼를 차려온 걸까. 어떤 마음이었는지 간절히 묻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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