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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ug 05. 2022

엄마는 성교육 선생님1

언제든 아이들이 질문해오면 성교육은 시작된다

나는 성교육에 진심이다. 아들만 둘을 낳아 기르게 되면서 나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다. 아이들이 위협이 되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으려면 내가 잘 길러야 한다. 아이들은 말도 못하는 아주 어린 날부터 고추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여자인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였다. 그 세계와 만나면서 나는 수시로 머릿속에 시뮬레이션 돌리는 연습을 했다. 성교육 하는 시뮬레이션.


아이들 성교육이 어려운 건 각을 잡고 시간을 따로 정해 갑자기 알리려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성교육이라는 걸 해볼까. 얼마나 민망한가. 내가 생각한 방식은 언제든 아이들이 질문을 해올 때마다 성교육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태연함이다. 성과 관련해 백지 상태인 아이들의 질문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이때 아이들의 질문에 당황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그저 호기심에 묻는 것뿐이니. 성은 야하고 감춰야 하는 비밀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구나 알아야 하는 분야가 바로 성이다.


성에 대해 감추고 뒤에서만 즐기려 하면 오히려 문제가 커진다. 양지로 꺼내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누어야 건강한 성문화가 자리잡힌다. 우리 세대가 자랄 때처럼 폐쇄적인 성교육을 아이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 지지부진한 공교육에만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다. 엄마인 내가 언제든 대답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우리집의 성교육은 주로 이렇게 시작된다. 어젯밤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던 시간, 갑자기 둘째가 물었다.


둘째 : 엄마 고추는 왜 있는 거야?

나 : 고추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지. 그게 뭘까?

둘째 : 쉬하는 거.

첫째 : 아기씨 내보내는 거.

나 : 맞아. 고추는 아주 중요한 그 두 가지 일을 하려고 있는 거야.

첫째 : 근데 아기씨는 어떻게 여자 몸 속에 들어가? 몸에 구멍이 어딨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나?


꺄르르 꺄르르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나 : 여자는 아래에 구멍이 세 개 있다고 했지. 쉬하는 음순하고 응가하는 항문 말고 하나가 더 있다고 했잖아. 질. 그쪽으로 들어가지. 질은 아기씨가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고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길이기도 해.

둘째 : 근데 옷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아기씨가 들어가?

나 : 짝짓기를 어른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랑을 할 때는 옷을 벗고 해. 그래서 고추가 직접 질로 아기씨 정자를 넣어주는 거야.

둘째 : 옷을 벗으면 부끄럽잖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

나 : 대부분 동물들의 경우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 보고 있어도 짝짓기를 하지만, 보통 인간은 숨어서 해. 사랑하는 사람 둘만 있는 곳에서 사랑을 하지.

첫째 : 근데 그러면 고추가 아프지 않아?

나 : 응 아프지 않아. 괜찮아.


누군가는 이 대화 내용을 보고 화들짝 놀랄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여섯 살, 여덟 살인 아이들과 나눌만한 대화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성을 금기의 영역으로 여기는 것은 어른들이다.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면 성교육은 무겁고 힘들게만 여겨진다. 전문가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전혀 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금기라 여겨지지도 않는다. 깨끗한 백지 상태의 아이들에게 성은 곤충들의 짝짓기처럼 당연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유희와 유전자 퍼뜨리기를 위해 행하는 당연한 행위일 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모두가 성교육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관련 책이나 읽어보라 권유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성 인식이 아이들에게 자리를 잡는다. 머뭇거리는 어른들의 모습이 성을 쉬쉬하며 뒤에서 몰래 알아보는 아이들을 만든다.


내가 성관계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열네 살쯤이었다. 너무나 충격이었다.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를 낳아 기른 모든 어른들이 야만인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나,하는 고민으로 오래 방황했다.


고등학교 시절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서 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내 스스로 알아봐야 했다. 몰래 숨어서 죄를 짓는 것처럼 공부해야만 했다. 야동을 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성과 관련된 책을 몰래 꺼내 읽어보곤 했다.


내 아이들에게 성은 그런 공포나 당혹감의 영역이 아니길 바란다. 아침이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동의 하에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당연하고 행복한 유희가 섹스이길 바란다. 혼자 하는 자위든 함께 하는 섹스든 그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가 원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나눌 수 있는 가장 깊은 교감 중 하나가 섹스 아닐까.


올바른  인식이 박힌 아이들이 자라 건강한 섹스를 하는 어른이 되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문화가 자리 잡으려면 부모인 내가 그런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언제든 갑작스런 아이들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도록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그리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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