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먼저일까, 삶이 먼저일까

글과 삶이 하나가 된다면

by 박순우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글 쓰기가 익숙해지면서 일기 숙제를 종종 한다. 여름방학 동안은 일주일에 두번 일기 쓰는 게 숙제였다. 숙제를 제 힘으로 하기 바라는 마음에 하라고 잔소리를 하진 않지만, 너무 잊고 있을 때는 한번씩 언급해 상기시켜주곤 한다. 그러면 아이는 주섬주섬 일기장을 펴고 일기를 써내려간다.


이따금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가 스스로 일기장을 펴고 글을 써나갈 때가 있다. 그럴 땐 한 장이 부족한지 두 장 넘게 일기를 쓰기도 한다. 그런 날은 주로 가족이 모두 함께 시간을 보낸 날이다. 엄마 아빠가 일하지 않고 종일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날, 아이는 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자신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적고 싶어 하는 것.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글이 먼저일까, 삶이 먼저일까.


한 지인의 아이는 매일 일기를 쓴다고 한다. 지인은 어릴 때부터 적어온 일기장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그걸 보고 스스로 시작한 일이란다. 문제는 매일 쓰다보니 아이가 좀 힘들어하기 시작한 것. 매일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다보니 아이는 무엇을 써야할지 몰라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은 여전히 아이가 일기를 쓰도록 한다. 매일 쓰면서 일상의 작은 부분을 글로 쓰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기 때문. 기존에는 그냥 지나쳤을 일들도 아이는 일기에 적게 됐고 실제 일상에서도 작은 걸 그냥 넘기지 않고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인은 그 시선이 너무 귀해 일기 쓰기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에세이를 매일 한 편씩 쓰다보면 아직 내 안에 글감이 남아있나 싶을 때가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나도 나름 굴곡이 많은 인생이라 생각해왔는데 내 인생이 상대적으로 평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를 돌아본다. 나는 쓸 자격이 있는가. 나는 매일 쓸만큼 충분히 많은 경험을 했나. 그럴 땐 여지없이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글이 먼저일까, 삶이 먼저일까.


관성처럼 소재를 찾고 글을 쓴다. 이따금 슬럼프에 빠지거나 일상에 큰 변화가 오면 글감을 찾지 못해 헤맬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종이 위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한 문장 한 문장을 힘겹게 써내려간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면 이 반복되는 행위가 나를 나로 살게 한다는 답변이 내 안에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하면 나의 하루가 그저 그렇고 그런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그래도 글 하나를 기어코 써낸 하루가 된다. 반복은 반복이지만, 반복이기만 한 건 아니다. 미세한 차이의 반복은 결국 긴 시간 속의 나를 변화시킬 거라 믿는다.


삶이 먼저라고 생각해왔다. 여전히 아주 조금은 삶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일상이라는 제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나는 글이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밀도 있는 삶이기에 쓰기도 하지만, 쓰기에 밀도 있는 삶이 되기도 한다. 쓰고보니 어느새 글과 삶이 하나가 된 듯하다. 쓰기에 살고 살기에 쓴다.


아이는 일기 외에 다른 글도 가끔 쓴다. 내가 쓴 글 중에 자신들이 등장하는 이야기 몇 개를 읽고는 엄마 글이 정말 재밌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들이 적어도 중학생은 돼야 내 글을 읽을 수 있을거라 믿었는데 아이들은 벌써 내 글을 읽는다. 그리고 그런 나를 따라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쓴다.


이야기는 개연성 없는 판타지가 될 때가 많지만 그런데도 아이들은 쓰는 걸 흥미로워하고, 결과물을 읽으며 만족해한다. 그 글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하고, 서로 글을 읽으며 깔깔 대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줄곧 써왔던 날들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박혀있음을 깨닫는다.


아이들은 나와 다르기에 아이들에게 쓰는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쓰는 게 힘들지 않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쓴다는 게 큰 마음을 먹고 온갖 경험을 해야만 가능한 특별한 영역이 아니라, 그저 흘러나오는대로 따라가도 되는 행위라 자연스레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쓰는 삶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언젠가 아이에게 쓰는 행위가 힘이 될 날도 오지 않을까. 나처럼 쓰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면 글이 먼저인지, 삶이 먼저인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글이 곧 삶이고 삶이 곧 글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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