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하늘

by 박순우

작가로 합류하게 된 [뉴리프]에 작성한 짧은 예시 소설입니다.



온몸이 움츠러드는 한겨울이지만 하늘만은 쨍한 날이다. 너무 차가운 것들은 하얀색이 아니라 파란색을 띤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만년설이 그렇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입술이 그렇다. 파란 하늘이 유독 차갑게 느껴진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 탓도 있으리라. 내 마음은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워진 걸까.


어느덧 4년이다. 그와 만나온 적잖은 시간 동안 내 마음이 늘 이렇게 낮은 온도는 분명 아니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처음 확인했을 때, 떨리는 첫키스를 했을 때, 내 마음의 온도는 데일 만큼 뜨거웠다. 물론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 무렵 그의 마음도 나와 퍽 비슷한 온기를 갖고 있었겠지.


그랬던 시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이제 그와 나는 더는 그런 온도로 들어설 수가 없다. 그의 온도와 나의 온도는 언제부턴가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뜨거우면 그가 차갑거나 그가 뜨거우면 내가 차갑거나. 온도차는 마음에 쉽게 생채기를 낸다. 생채기가 하나둘 더해갈수록 나는 마음의 문을 조금씩 닫기 시작했다.


더는 상처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는지, 지금까지 생긴 상처가 잘 아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서서히 닫혀가던 문은 결국 틈새 없이 완전히 꼭 닫혀버렸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 내게 온도를 다시 높이기 위한 말과 행동들을 던졌지만, 나는 끝내 문을 다시 열 수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문을 닫은 이대로가 좋았다. 나는 그저 나로 서고 싶었다.


왜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였냐고. 실낱 같은 많은 날을 두고 왜 하필 너무도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계절, 그것도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냐고. 그날이 무슨 날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차갑고 차가운 파란 하늘 아래 그와 나란히 앉아 의미 없는 크리스마스 계획을 짜면서, 나는 더는 무의미한 만남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차가운 계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잡기 놀이를 하며 뛰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는 거짓이 없었다. 표정도, 웃음소리도, 뛰는 발걸음 하나하나도 모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담겨 있는 순수한 아이들. 그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진솔한 내가 되고 싶었다. 자유롭게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더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며 의무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뱉었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듯했다.

“그게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지금 내일 뭐할지 정하고 있는데.”

파란 하늘과 놀이터를 뛰어노는 아이들만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나는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진심이야. 이렇게 된 지는 좀 오래 됐어. 애써 부정하며 의무감으로 버티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이제는 그만 하고 싶다.”

“내가 뭐 잘못한 거야? 내가 노력할게. 어떻게 하면 될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진심이야.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내 안에 남아있는 감정이 없어. 이런 상태로 관계를 지속하는 거 이제 정말 지친다. 그만 하자.”

“왜 이래 정말? 우리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너한테는 그 시간들이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왜 그러는데 대체?”

그의 음성이 점점 들리지 않는다. 마치 심해에서 물 밖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웅웅 거린다.

“그 시간들이 아무 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냥 전부 그만 하고 싶어. 그뿐이야. 제발 날 좀 이제 놓아줘. 부탁이야.”


끊이지 않고 아이들을 태우던 그네에 웬일인지 자리가 비어있다. 돌아보니 놀이터에서 깔깔 대던 아이들이 뒤돌아 걸어간다. 주인을 잃은 그네가 정처없이 앞뒤로 흔들린다. 저 그네에 앉고 싶다. 그네에 앉아 저 파랗고 파란 하늘 높이 떠오르고 싶다.


그는 내 귓가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자신이 잘 하겠다고. 대체 왜 그러냐고. 여전히 나는 심해에서 웅웅 거리는 그의 음성을 듣는다. 이 대화도 이제는 그만 하고 싶다. 감정이 남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는 건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그런 관계는 서로를 갉아먹을 뿐이다.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한다.


“이제 그만 가줄래?”

“어 뭐라고?”

“이제 그만 가줘.”

어이없다는 듯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그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숨. 나만 바라보던 그가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 본다. 만지면 쨍하고 단숨에 깨질 것만 같은, 너무 차갑다 못해 파랗고 파란 그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 간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따라 나도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다시 한숨을 한번 내쉰 그가 내 손을 마주 잡는다. 우리는 그렇게 4년만에 처음으로 악수를 한다. 늘 따뜻하던 그의 손이 오늘따라 유독 차갑게 느껴진다. 차가운 건 그의 손일까, 내 마음일까. 그가 손을 놓고 뒤돌아 걸어간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그렇게 또 한번의 사랑이 떠나간다.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잃지 않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그네에 털썩 주저 앉는다. 오랜만에 앉아본다. 늘 동네 아이들이 독차지해 멀리서만 바라보던 그네를 오늘은 내가 앉아본다. 그네를 최대한 뒤로 뺀 뒤 다리를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오랜만이지만 내 몸은 그네 타는 법을 잊지 않았다. 오르내리는 그네의 반동에 따라 내 몸도 익숙하게 반응한다.


서서히 그네가 하늘 높이 올라간다. 공기를 가르는 바람이 한겨울인데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나는 더 세차게 다리를 구르고 몸을 움직인다. 가장 높이까지 오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높이까지 내 몸을 던지고 싶다. 그곳에 하늘이 있다. 파랗고 파란 하늘. 더는 그저 차갑지만은 않은 푸르고 푸른 하늘.



<본 저작물은 뉴리프를 통해 작성하였으며, 해당 글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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