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옆에서 곤히 자다 슬며시 눈을 뜬 새벽, 시계를 보니 5시쯤이었다. 아직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깨어나면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 힘들다. 다시 자야만 한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데 바닷물이 가득 들어찬 선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90도로 기운 배 안, 구명조끼를 입고 둥둥 떠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구하고자 소방호스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는 사람들, 무섭게 들어차는 바닷물, 선체를 때리는 파도소리, 배 안을 가득 채운 절망의 목소리들. 다시 눈을 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는데, 왜 이리 선명하게 장면이 떠오르는 것일까. 전날 읽은 책 때문일까. 책 제목은 [홀]이다. 부제는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이 책을 쓴 김홍모 작가는 용산참사, 제주 강정마을 투쟁, 제주 4.3 등 한국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그려온 만화가다. 이 책은 작가가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선보인 작품으로 생존자 중 한 명의 가족을 취재해 시나리오를 짜고 그림을 그린 책이다. 작년에 나온 책이지만 도서관에 들어온 책은 여전히 초판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어온 책을 단숨에 읽어보았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새벽녘 잠에서 깬 나의 뇌로 고스란히 들어와 연속 재생된 것이었다.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은 '김민용', 실제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김동수' 씨다. 제주도민으로 육지에서 일을 마치고 제주로 오던 길에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 배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다 가장 마지막에 빠져나온 인물이자,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여러 차례 자해를 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김 씨는 배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시점부터 기억이 끊긴 것. 정신과 의사는 그때 본 것들이 너무 괴로운 기억이라 보호본능의 작용으로 기억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오히려 기억이 안 나는 게 좋을 거라며, 기억을 하게 되면 못 견딜 거라고.
나중에 해경이 찍은 영상 속에서 김 씨는 혼자 세월호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었다. 기억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덜덜 떨리는 팔로 구명조끼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김 씨는 그 이후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환영을 보고 자살 시도를 반복했다. 가족들 역시 피해자였다. 김 씨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가족에게도 전달돼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자주 맞닥뜨려야 했다. 김 씨처럼 제주에 살고 있는 세월호 생존자는 모두 24명, 전국적으로 172명의 생존 피해자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만 살아 나왔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엄연한 피해자인 이들이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화로 엮여있어 금세 볼 수 있는 책이었지만, 장면 장면마다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저 막연했던 배 안의 상황들이 그림으로 살아나 내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8년, 그해 내 뱃속으로 찾아온 아이는 벌써 훌쩍 자라 학교를 다니는데 세월호의 시간은 여전히 깊은 바닷속에 잠겨있다. 잠시 책을 통해 접한 나도 이런데, 그 장면을 직접 보았던 생존자들은 얼마나 깊은 상흔 속을 허우적대고 있을까.
착잡한 마음이 책을 덮고도 가라앉지 않았다. 배 안에 아직 사람이 갇혀있다는 생존자들의 절규에도 전원 구출이라는 오보를 버젓이 내보낸 언론들과 가라앉고 있는 배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사람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려 한 또래 아이들을 징계한 학교와 희생자 가족을 비웃으며 음식을 먹고 처참한 비유를 일삼던 일베들까지. 공허한 메아리만 퍼졌던 끔찍한 시간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들과 어린아이들부터 구하라며 손짓을 하신 어르신들까지. 김 씨의 기억을 더듬은 장면들이 책을 읽는 내게도 고스란히 아프게 새겨졌다.
책을 덮으며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너무 아픈데도 불구하고 증언해주고 마침내 글과 그림으로 종이에 새겨줘서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은 펀딩을 통해 제작됐는데 모두 1,070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생존자들은 세월호 진실 규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다. 배와 함께 침몰한 304명의 목숨처럼 172명의 생존자들도 여전히 그날 그 배 안에 갇혀있다.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죽는 날까지 연대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