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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희극은 사실 하나

냉기와 온기를 동시에 지닌 계절 가을을 지나며

by 박순우

'시월'이란 글감을 만나자마자 내가 써내려간 ​에는 계절의 찬란함이 담겨 있다. 여행 속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골라 한데 묶어 일상의 무료함을 견디게 해주는 소중한 추억으로 적은 것. 그 글만 보면 여행은 마냥 달콤하고 나는 그런 여행을 많이 다닌 수혜자가 된다. 하지만 '이란 무엇인가'​의 글 속에 담긴 내 여행은 마음의 집이 없었던 이가 전세계를 떠돌며 집을 찾아다니는 방황의 기록이다. 같은 경험이라도 각도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비춰지는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것.


글쓰기 모임 열한번째 글감이었던 '시월'은 다섯 명의 프리즘을 통과하며 서로 다른 색감을 드러냈다. 내 글에서는 울긋불긋한 단풍의 빛이었다면, 또 다른 이에게는 사랑스런 파스텔톤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쓸쓸한 가을비가 내리는 무채색이었다. 가을은 높은 하늘, 적당한 온도로 찬란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겨울의 예감을 간직한 스산한 계절이기도 한 것. 색과 톤이 저마다 다른 글들의 합평을 마치며 다시 한번 이런 모임을 할 수 있어 감사했다. 다른 시선, 다른 사람, 다른 인생이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달라서, 다르기에 참 감사하고 가치 있다.


글 속에 내 생일을 언급했기 때문일까. 멤버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손에 하나둘 무언가를 들고 카페에 들어섰다. 누군가는 작은 케이크를, 누군가는 달콤한 간식을, 누군가는 신상 논알콜 맥주를, 누군가는 예쁜 꽃이 담긴 꽃병을. 그 작지만 커다란 마음들이 참 감사했다. 민망하지만 생일축하 노래도 듣고 후 하고 촛불도 끈 아침. 가족이 아닌 이들과 생일파티를 한 게 언제였더라. 민망함 속에서도 소원을 빌며 촛불을 껐다.


그제 밤 갑자기 써내려간 엄마에 대한 글로 어제는 내내 침울해져 있었다. 아직 내 안에서 소화되지 않은 이야기를 글로 적으면 다 쓰고 나서도 시원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답답함이 배가 된다. 온종일 침울함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합평을 준비했다. 뭔가 미흡한 것만 같아 준비를 마치고도 내내 뒤가 찝찝했다. 그 와중에 내 글을 읽고 우울한 나를 토닥여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파티 분위기를 연출해준 글쓰기 멤버들도 있었고.


어제 나를 위로해준 이들 중 하나는 오늘 위로가 필요한 이가 되었다. 나는 어제와 달리 포근한 하루를 보냈는데 그는 자신의 넉넉한 품을 내주었던 어제와 달리 차가운 하루를 보냈다. 인생이란 참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것, 고작 하루만에 감당할 수 없는 온도차를 건너는 것. 마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삶은 안갯속이다. 그래서 매력이지만, 그래서 때로 숨이 막힌다. 감당할 수 없는 암흑에 갇히면 도무지 출구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으니까.


같은 여행에 대한 글이 어디에 조명을 비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이 되듯, 인생도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요즘 비수기라 통 손님이 없고 택배기사분이 테이블 위에 택배를 올려놓는 바람에 큰 스크레치가 났다. 예상치 못한 생일파티를 했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화사하게 빛나는 선물받은 꽃이 놓여있다. 전자에 초점을 맞추면 나의 하루는 엉망이고, 후자에 초점을 맞추면 나의 하루는 찬란하다. 나는 후자의 기억만 남기기로 결정한다. 나의 삶은 결국 나에 의해 쓰이기에, 기억을 선택하는 것도 나라고 믿기에. 차가움과 따뜻함을 모두 지닌 시월을 꼭 닮은 하루가 저물어간다. 이 글이 차가운 하루를 보낸 이에게 작은 온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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