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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Nov 28. 2022

섬의 가을을 걸었다

아이의 눈으로 걷는 숲의 풍경

  섬의 가을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만날 수 있다. 일교차가 적어 단풍이 지더라도 충분히 선명하게 울긋불긋하지 않다. 일교차가 큰 깊은 산으로 가거나, 이곳만의 가을을 담은 것들-억새라든가, 노랗게 익어가는 귤이라든가-을 찾아다녀야 비로소 가을이 가슴 가득 채워진다. 가을이 오면, 짧디 짧은 찰나의 아름다운 계절이 오면, 하루 쉬어가는 일요일에는 아이들과 꼭 단풍을 만나러 한라산에 오르고, 억새를 만나러 오름으로 가야지, 하고 다짐을 했었는데...... 가을의 한복판에 지독한 감기로 첫째가 자꾸 열이 오른데다, 지난 주말엔 비까지 내려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첫째의 열도 내리고, 이제 좀 가을을 즐겨볼까 하니 어느덧 12월이 코 앞이다.


  억새는 반짝이던 생기를 잃어 푹 퍼져 버렸고, 그나마 있던 단풍은 지난 비에 대부분 떨어져버렸다. 가을을 몸 안에 채우지 못한 채 겨울을 맞자니 아쉬움이 몰려온다. 짧더라도 제대로 계절을 통과해야만, 다음 계절도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늦었지만 몸을 일으켜 봐야지. 깊은 겨울이 찾아오면 더 몸이 움츠러들테니, 가을의 끄트머리라도 느끼러 길을 나서야지.


  놀러가자는 말에 첫째가 말한다.

"동물원 안 간지 엄청 오래 됐는데, 동물원 가자."

갇혀 있는 동물들이 보고 싶지 않은 나는, 잔소리 같은 설명을 시작한다.

"동물을 사랑할수록 동물원에 가면 안 되지 않을까. 우리가 자꾸 동물원에 가면, 동물을 가두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야."

종종 동물들이 지내는 공간이 얼마나 협소한지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동안 나눠온 대화 때문인지 아이들은 다행히 쉽게 수긍한다.

"그럼 어디 가지?"

어젯밤 남편과 갈 곳을 미리 정해둔 나는 넌지시 제안한다.

"숲에 갈까?"

둘째가 웬일로 선뜻 좋다고 한다.

"응 좋아. 가서 곤충도 잡자."

"겨울이 코 앞이라 곤충이 있을지 모르겠네."

아이들은 다행히 크게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작은 곤충채집통 하나를 들고 내가 정한 목적지로 따라 나섰다.


  섬의 관광객이 늘면서 좋아하던 장소가 유명지가 된 경우가 많다. 유명지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북적이고,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의 손길도 미치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가더라도 실망을 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 매년 단풍 구경을 갔던 천아계곡도, 억새가 찬란한 새별오름도, 새하얀 백사장과 고즈넉한 풍경이 아름다운 우도도 이제는 갈 엄두를 잘 내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 새로운 곳을 찾게 된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 덜 유명한 곳. 숨겨진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이번에 알아본 곳은 좁은 삼나무 길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오름 둘레길이었는데, 기존의 널찍한 산책로가 아닌 게 마음에 쏙 들어 메모를 해둔 참이었다. 걷기 좋게 넓고 평탄하게 닦은 길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런 길만 반복되면 걷기에 좀 지루하게 느껴진다. 너무 곧게 뻗은 길은 가도가도 같은 풍경일 거란 생각에 기대가 반감되기 때문. 반면 좁고 굽어진 길은 다음 풍경이 궁금해 발걸음을 옮기는 게 신이 난다.


  도착한 곳은 여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안내가 잘 돼있지 않은 곳이었다. 간략하게 표시된 안내판 하나를 참고용으로 사진 찍은 뒤 길을 나섰다. 입구에는 수십 마리의 소 떼들이 흩어져 저마다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기가 동물원이야. 어때, 멋지지?"

첫째가 대답한다.

"소들이 넓은 곳에서 사니까 좋다. 여기 있는 소들은 행복하겠다. 나도 여기서 살까?"

둘째가 받아친다.

"형 그럼 여기서 살아. 아무데서나 쉬해도 되겠다."

둘은 깔깔 대며 웃는다. 웃음이 참 많은 아이들, 할 얘기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웃기도 울기도 참 잘 하는 아이들.


  섬의 숲은 일 년 내내 푸른 빛이다. 침엽수도 활엽수도 큰 변화 없이 자리를 지킨다. 드물게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과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눈에 띈다. 때문에 온전한 가을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둘째는 곤충을 찾겠다며 지나가면서 보이는 돌멩이들을 죄다 들춰보고, 첫째는 이 나무 저 나무의 생김에 대해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걸음을 옮긴다. 뒤따라오던 둘째가 발을 성큼성큼 내딛으며 말한다.

"엄마 낙엽 밟는 소리 좋지?"

소리에 민감한 편인 둘째의 말이 참 사랑스럽다.

"맞아. 낙엽 밟는 소리 참 좋지."

 말을 듣고 새삼  밑을 보니 언제 떨어졌는지 가는 길마다 온통 낙엽이 한가득 쌓여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푸르른 나무들 때문에 가을 느낌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모든 가을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구나. 그제야 섬에도 가을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이런 풍경이 익숙한 가을의 모습이 되겠지.


가을이 빠진 웅덩이


  숲을 걷다 만난 웅덩이에는 가을이 빠져있다. 공중에서는 충분히 울긋불긋하지 않았던 단풍이 물에 젖으니 훨씬 선명한 색을 띄게 된 것. 가을 웅덩이구나. 가을이 여기에 고여 있었구나. 아이들은 그 웅덩이 곁에 쪼그려 앉아 가만히 물 속을 응시한다. 혹시나 아직 있을까 싶어 개구리를 찾는 것. 그 어디에도 생명체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겨울을 준비하러 갔구나. 아쉬워하는 아이들.


  길을 따라 걷다보니 기대하던 삼나무 숲이 나왔다. 사려니 숲길에서 마주하는 삼나무 숲이 잘 정돈된 모습이라면, 이곳의 삼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라난 모습이다. 하늘을 향해 찌를듯 곧게 솟아오른 나무의 끝을 바라보며 첫째가 말한다.

"엄마, 예전에 아르젠티노사우르스 같은 공룡이 저 높은 곳의 잎들을 따 먹었겠지?"

"맞아 그랬을 거야."

한창 길이와 속도에 꽂혀 있는 둘째가 나무마다 가리키며 묻는다.

"엄마, 이건 몇 미터야? 엄마 이건? 아르젠티노보다 이게 더 커?"


길고 곧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삼나무들


  그러고 보니 공룡이 살던 시대의 숲 같다. 온화한 기온과 높은 습도의 공기를 들이마시자니 중생대 시대의 지구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다. 미세먼지가 좀 있는 날이었는데, 깊은 숲으로 들어가니 미세먼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들이 저마다 내뿜는 다채로운 향이 뒤섞이고, 흙이 밤새 품은 습기가 올라오면서, 숲의 공기는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맑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몸 내부까지 한껏 정화되는 느낌이다. 첫째가 조금 뒤떨어진 둘째를 부르며 목소리를 크게 높인다. 숲 사이를 뚫고 간 첫째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부딪혀 다시 되돌아 온다.

"소리가 되돌아 오네. 이게 뭔지 아는 사람?"

둘째가 웃으며 재빨리 대답한다.

"메아리!"

첫째가 아쉬운 듯 말한다.

"나도 메아리 아는데. 아 아 아"


  조금  걸으니 커다란 바위를 감싸고 자라난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가 떠올랐다. 돌로  사원을 감싸고 자라난 나무들이 그곳에는  많았다. 굵고 단단한 뿌리가 감싼 사원은 지나온 길고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섬에도 이런 나무들이 있을 줄이야. 아이들에게 여행 가서  풍경들과 이곳 나무들의 공통점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자니,  비슷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나온다. 함께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다가  길을 걷는다.


제주에도 이런 나무가 있을 줄이야


  맨 앞에서 걸어가던 남편이 갑자기 집게 손가락 하나를 입에 바짝 대고 쉿을 외친다. 영문도 모른 채 발걸음도 멈추고 수다도 중지하고, 아이들도 나도 가만히 귀를 연다. 어디선가 딱딱딱딱 부리로 나무를 쪼아대는 새의 소리가 들려온다. 집중해서 들어보니 한 군데가 아니다. 소리는 두세 군데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아이들의 두 눈이 동그래지고,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다. 남편이 입을 연다.

"딱따구리 같은 새가 집을 짓고 있나봐."

"와 진짠가봐."

우리는 그 뒤로 수상한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열었다. 까마귀, 산비둘기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가 쉴 새 없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첫째가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숲 속을 걸어요. 산새들이 속삭이는 길."

"어? 이 길이 그 길이네?!"

내가 말하자 첫째는 맞다며 싱긋 웃어보인다.


  걷다 보니 발 아래 작은 열매들이 보인다. 하나 집어 올려 살펴보니 도토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참나무 계열의 아름드리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에게 알려주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도토리를 작은 고사리 손으로 연신 줍는다.

"엄마 이걸로 집에 가서 도토리 요리 해줘."

"응? 엄마 할 줄 모르는데..."

나도 덩달아 도토리를 줍다가 갑자기 밤이나 도토리를 주우면 안 된다는 글이 생각난다.

"맞다. 밤이나 도토리 주우면 안 된대. 다람쥐들이 겨우내 먹을 거리가 없어진대. 우리 주운 거 다시 내려놓고 가자."

둘째가 말한다.

"다람쥐는 어차피 도토리 숨겨놔도 잘 못 찾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숨겨놓은 데 중에 몇 개는 찾아서 먹기도 해. 못 찾은 건 나무가 되고."

아이들은 두 손 가득 주운 도토리를 여기저기에 뿌린다. 아쉬운지 딱 하나만 갖고 가겠다고 한다. 그 정도는 다람쥐도 이해해줄 거라 말하며 곤충채집통에 곤충 대신 도토리 두 알을 담았다.


  숲길 끝자락을 걷는데 어딘가에서 날아온 달큼한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지만, 꽃은 눈에 띄지 않는다. 둘째도 킁킁 대더니 말한다.

"엄마, 달콤한 냄새가 나. 꿀인가?"

"글쎄... 꽃은 안 보이는데. 무슨 냄새일까?"

"꿀 먹고 싶다. 집에 꿀 있어? 집에 가면 꿀 먹자 우리."

아이들과의 대화는 늘 어디로 튈지 모른다. 정형화되지 않은 아이들의 생각과 언어는 나를 다시 살게 한다. 다시 아이처럼 살아가게 한다. 숲을 빠져 나와 정자에 나란히 앉아 준비해 간 황금향 몇 알을 까서 나눠 먹었다. 아이들은 아기 새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날름날름 잘도 받아 먹는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 잘 먹는 아이들을 볼 때면, 내 배가 부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삶이 꽉 차오른다.


  제자리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숲길을 찬찬히 다시 곱씹는다. 굽이굽이 나타났던 풍경들을 떠올린다. 입구에 벚나무가 많았는데, 봄에도  다시 와야지. 그때는 다른 산책길도 걸어봐야지. ‘더할 나위 다’는 말을 좋아한다. 더할 필요도 뺄 필요도 없는, 꼭 맞게 만함을 이르는 말. 더할 나위 없게 늦가을을 걸었다. 이제 곧 겨울을 걸을 시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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