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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Dec 01. 2022

의문이 아니라 질문

'질문'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질문'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글을 쓰긴 싫다. 그래서 좀 색다른 글을 쓰고자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린다. 그런데 생각이 모자란 건지, 질문에 대한 질문이 부족한 건지, 자꾸 같은 주제 사이만 오간다. '질문' 하면 누구나 으레 떠올릴 만한 그런 주제들. 그러다 급기야 질문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글을 써보기로 한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글을 쓰면서 나온 생각을 머리에 넣으려는 것. 에세이 쓰기 모임인데, 아무래도 이 글이 에세이는 아닐 것 같다. 망했다.


질문으로 쓸 수 있는 글의 예상 목록이 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건 '아이들의 질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보니, 게다가 아이들이 아직 '왜' 혹은 '이게 뭐야'의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던지는 나이다 보니, '질문'이란 말에는 자연스레 아이들이 따라붙는다. 아이들의 질문이 귀찮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나를 성장시킨다. 보호자로서 가진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질문을 계속 이어가느냐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게 하려면, 나는 무얼 도울 수 있을까.


두 번째는 '내 삶을 바꾼 질문들'이다. 수많은 고비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만큼 값진 게 있을까. 묻고 또 물을수록 본질에 가까워진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가 정말 하고자 하는 것'처럼 '진짜'나 '정말'이 붙은 질문에 대한 답들은, 늘 나를 도전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진짜 원한다잖아! 정말이라잖아! 그런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면 늘 비장함이 따라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질문의 힘이었다. 


세 번째로 떠오르는 건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한 질문'이다. 나에 대한 질문도 의미가 있지만, 타인에 대한 질문도 가치가 있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는 지켜야 할 선이 없다면, 타인에 대한 질문에는 선을 지키는 게 필수다. 사람은 누구나 질문을 받고 싶어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질문은 곧 상대에 대한 관심이기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지나치지 않는 이상, 질문하는 자가 싫어하는 인물이 아닌 이상, 분명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배설하고자 하는 욕구를 나는 거의 본능이라고 본다.


네 번째는 두 번째 주제와 비슷하지만, 시점과 대상이 좀 다르다. '내 삶을 바꾼 질문들'이 과거와 자신에게 국한된 것이라면, 네 번째로 언급할 주제는 미래와 사회 전체로 범위를 넓힌 것이다. 몸은 늙더라도 마음은 늙고 싶지 않다면, 나이가 먹었더라도 꼰대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질문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과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뇌가 늙지 않는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니, 성찰의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을 향해 자꾸 질문을 던지면, 편견의 양을 줄일 수 있다. 아주 작은 편견도 걷어내는 노력이 늙지 않는 삶을 완성한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던 주제들을 네 번째까지 나열하고 나니, 왜 나는 이런 주제들을 시시하게 여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데, 그게 무엇이든 어딘가에는 분명 뿌리가 있을 텐데, 철학자도 과학자도 아닌 나는 얼마나 더 새로운 생각을 담은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가. 그러니 질문에 대해 의문만 가질 뿐, 정작 질문은 시작도 하지 못한 게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머리를 정리하고, 모난 마음도 잘라내고, 의문이 아닌 질문을 던져본다. 내게 질문은 무엇인가. 질문의 사전적 정의는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이다. 나는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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