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각도만으로도 충만한, 따뜻한 겨울비가 내린다
분명 비 예보가 있었는데 아침 하늘은 쾌청하다 못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질까. 의심의 눈초리로 시작한 아침이었다. 섬에 살고부터 날씨를 매일 확인한다. 온도뿐만 아니라 바람의 세기와 방향, 비의 양도 꼼꼼히 살핀다. 마당에 내어놓은 세간살이를 그대로 둘지, 치울지를 결정하는 건 오로지 비와 바람에 달렸다. 비 양이 적고 바람이 잔잔하면 그냥 두지만, 비 양이 적어도 바람이 거세면 살림살이를 그대로 둘 수가 없다. 모조리 날아가 여기저기 박혀버리기 일쑤이니.
어제 우연히 찾은 십 년 전 글에 '제주의 겨울은 바람의 것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제주의 겨울은 차지만 푸르다'는 문장도. 제주의 푸르지만 혹독한 겨울을 처음 마주하고 적잖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써 내려간 글이었을 것이다. 이주 초창기엔 겨울만 되면 약한 우울감에 사로 잡혔다. 폭풍같은 바람에 발은 묶이고 마음은 줄곧 떠나온 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문을 꼭 걸어 잠가도 스산한 바람이 가슴으로 들어차는 듯했다. 바람처럼 살고 싶다 노래하던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진 게 그쯤이었다.
기상청 예보가 틀리지 않았는지 정오가 다 되어가자 멀리서 거짓말처럼 거대한 구름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물기 가득한 공기가 코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비구름이구나.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늘고 꾸준하고 곧게 낙하하는 겨울비였다. 섬에서는 보기 드문 지표면에 직각으로 내리꽂는 비. 섬에 내리는 비나 눈은 곱게 하강하는 경우가 드물다. 누가 바람의 섬이 아니랄까봐. 비도 눈도 중력을 거슬러 가로로 흩날린다. 눈은 때로 다시 하늘로 치솟기도 한다. 공중에서 그리 시달렸기 때문일까. 정작 바닥에 내려앉으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한강 작가는 그런 섬의 눈 내리는 풍경을 이렇게 그린다.
젖은 도로면의 온도가 아슬아슬하게 빙점 언저리여서겠지만, 이렇게 많은 눈이 조금도 쌓이지 않고 흔적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해할 수 없는 대기의 작용으로 바람이 갑자기 정지하는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커다란 눈송이들이 얼마나 느리게 하강하는지, 달리는 버스에서가 아니라면 정육각형의 결정들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바람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하면 마치 거대한 팝콘기계가 허공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듯 눈송이들이 솟구쳐 오른다. 눈이란 원래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끝없이 생겨나 허공으로 빨려 올라가는 거였던 것처럼. p60
이런 곳이다 보니 웬일로 바람이 잔잔해 비나 눈이 곧게 지상으로 떨어지면 내 마음까지 한결 차분해진다. 늘 중력의 법칙에 충실한 비와 눈이 내리던, 등져버린 지난 삶의 터전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제 찾은 글 속에는 십 년 전 끼적였던 다섯 편의 단편소설도 들어 있었다. 내 손으로 파일을 삭제해놓고 두고두고 후회했던 그 글이 버리려고 내다 놓은 상자 안에 버젓이 들어 있었다. 어설프지만 어떻게든 이야기로 만들어보려 애썼던 흔적들이 문장 켜켜이 박혀 있었다. 세상엔 내보일 수 없는 졸작이지만 내게는 뜻밖에 다가온 선물이었다.
십 년 전의 문장을 들여다보며 어쩔 도리 없이 지금의 내 문장과 한데 올려두고 저울질을 한다. 문장만이 아니라 원천인 내 마음도 둘러본다. 나는 그때의 나보다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지난 십 년은 문장을 다듬기보다 삶을 다듬는 시간이었다. 상처받은 스스로를 섬으로 피신시키고 낯선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섬사람이자 엄마가 되어가는 날들이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 년 남짓, 글보다는 그래도 삶을 느끼는 내가 더 깊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 시절 함께 글을 쓰던 언니 하나가 내게 말했다. 그 시간 동안 삶의 글감을 차곡차곡 모은 거라고.
한동안 소설을 열면 부러워서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나도 쓰고 싶은데, 나는 쓸 수 없는데, 나는 시간이 없는데, 핑계만 잔뜩 늘어놓고는 내 글을 쓰지도 남의 글을 엿보지도 못했다. 여전히 내가 찾는 글옷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어제 찾은 다섯 편의 글로 곳간에 쌀을 비축해 둔 것처럼 속이 든든하다. 곧게 떨어지는 겨울비가 대지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촉촉하게 적신다. 요 며칠 이상기온으로 섬에 벌써 봄이 온 것만 같았는데, 오늘 내리는 비가 봄을 더 재촉하는 듯하다. 이제 깨어나라고. 싹을 틔울 때라고.
얼마 못 가 아직 겨울은 가지 않았다며 차디찬 바람이 불어오고 몸도 움츠러 들겠지만, 지금의 이 든든함은 잊지 말아야지. 보물 같은 선물 같은 봄날 같은 단비 같은 이 다디단 시간을. 곧은 각도만으로도 충만한, 따뜻한 겨울비 내리는 한때를. 그렇게 작은 씨앗 하나가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