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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얼굴

by 박순우

자리를 이탈하면 글을 쓰기가 힘들다. 노트북을 갖고 시댁에 갈 순 없으니 핸드폰만 믿고 길을 나선다. 시부모님 앞에서 쓸 수 없어 아이들이 잠들면 곁에 누워서 핸드폰을 켠다. 글쓰기 어플을 열어 하얀 백지에 검은 글씨들을 무작정 새겨 넣는다. 누워서 오랜 시간 핸드폰을 붙들고 있으면 팔이 아프니,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글을 쓴다. 퇴고를 할 시간이 없어 글을 결국 올리지 못하고 그저 쌓아두기만 한다. 글에도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지나버리면 게시하지 못한다.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오겠지 하며 보관하는 수밖에.


나름 매일 끼적거렸는데도 어젯밤 제대로 글을 쓰려니 한 문장 한 문장이 버거웠다. 마치 글자를 막 깨우친 사람이 첫 글을 쓰는 것처럼 적절한 단어도 표현도 잡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흘려보냈다. 다 쓴 글을 읽어보니 애초에 하려던 말은 흐려져 있고, 새로운 생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한 땀 한 땀 기워내듯 써낸 글을 한참 멍하게 들여다 보다 결국 퇴고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쓰러져 잠을 청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섬의 밤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바람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져 있었다. 미친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제와는 또 다른 섬의 얼굴이었다. 며칠 전 육지 시댁을 방문했다가 제주공항에 내려 숨을 들이마시며 아이들과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역시 제주도가 따뜻해. 엄마 제주도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어. 그날 제주에는 따뜻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잠잠했고. 그로부터 이틀 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만 같은 태풍급 바람과 싸락눈이었다.


눈을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아이들도 창에 매달려 구경만 할 뿐 차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든 거리가 꽁꽁 얼어붙고 비행기도 배도 모두 멈추고, 관광객들의 발도 묶였다. 어느 카페에 갇힌 지인은 오분마다 달라지는 날씨에 대체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바로 지금이야, 싶은 순간 뛰쳐나가라고 우스갯소리 같은 진담을 건넸다. 마냥 온화하고 평화로운 얼굴도, 길을 걷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날카로운 얼굴도 모두 섬의 얼굴이다.


섬의 날씨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얼굴을 달리 한다. 그리 크지 않은 섬이지만 동쪽과 서쪽의 날씨가 다르고, 십 분 거리의 지역도 햇살과 바람이 다르다. 누군가에게 섬은 낭만 그 자체이지만, 누군가에게 섬은 여기에서 이제 그만 나가라 등 떠미는 쌀쌀맞기 그지없는 곳이리라. 비행기가 날씨로 결항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혹여 섬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된다. 십 년차 이주민인 내게 이제 섬은 애증의 공간이어서, 이곳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도 하기에. 어딘가에는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모두 사랑하는 이들이 있겠지. 모두가 섬을 사랑할 수는 없겠지.


여전히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게 버겁다. 너무 쉬이 쓰이는 것도 불안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쓰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두렵다. 한파에 얼어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피가 통하게 애를 쓰는 것처럼, 머리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글을 쓴다. 또 한동안은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처럼 재활을 해야겠구나. 아예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흐르듯 글을 쓸 수 있겠지. 그러니 부끄러운 글도 생긴 그대로 세상에 내어놓는다.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라고.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섬처럼, 내게도 그런 두 개의 얼굴이 있다고.



고양이는 어딜 그리 바쁘게 걸어갔을까. ©️박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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