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다', 딱 그만큼.
'착하다'는 말이 있다. 본래 뜻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하지만 원래 뜻은 어딘가 퇴색돼 보인다. 진짜 의미보다는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에 대해 할 말이 없을 때 대충 얼버무리기용으로 사용하는 단어같다. 착하기만 한 사람은 없어서일까, 착하면 바보 취급 당하는 세상이라 그럴까. 아니면 내 마음이 착하다는 말을 밀어내고 있는 걸까. 한 세기쯤 뒤에는 착하다는 말의 의미가 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씁쓸한 예상을 해본다.
'좋다'라고 써놓고 물끄러니 바라본다. 이 단어도 착하다는 말처럼 의미가 달라 보인다. 특색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너무 자주 쓰기에 오히려 이 말이 가진 진짜 의미가 빛바랜 것일까.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어 사전을 뒤적인다.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 나는 왜 별 생각 없이 좋다고 적었을까. 보통 이상 수준의 만족감이었을까. 단어가 지닌 흔함이 싫어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말을 들여다본다. 유의어로 건강하다, 곱다, 괜찮다가 적혀 있다. 좋다와 비슷하지만, 내가 원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좋다'에 시선을 고정한다. 곁눈질을 하다 돌아봐서일까, 그제야 좋다의 의미가 굴절없이 마음에 들어찬다. '좋'이란 발음에서 잔뜩 힘을 올려 부쳤다가 '다'하며 숨을 강하게 내뿜으며 마음도 내려놓는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든다. 글자로 쓸 때의 좋다가 밋밋하다면 감정을 담아 입으로 내뱉을 때의 좋다는 꽤 다르구나. 너무 흔하다 해서 그 의미마저 바뀌는 것은 아닐 텐데. 변한 건 단어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을까. 단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이전과는 다르게 그저 있는 그대로 '좋아' 보인다.
드디어 독감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일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이전의 일상은 아니고, 아이의 방학으로 반쪽짜리 일상이다. 이전 같으면 확 줄어든 개인 시간으로 속이 상할 법도 한데, 무너진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다 반쪽이라도 찾아 누리니 이만큼의 조각이라도 다시 찾은 게 감사하다. 참 좋다. 이 맥락을 적고 싶어 '좋다'라고 써놓고는 뭔가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 같아 망설이다, 결국 다시 살려둔다. 그러고 보니 좋다가 가장 적확하다. 무탈함이 행복이고 평범이 오히려 비범이듯, 좋다의 그 흔하디 흔함이 사실 지금의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다. 말놀이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다시 일상이구나.
지난 한 주간은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얼 써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관성의 법칙에 따라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썼다. 쓰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 자주 새벽이 되었다. 두세 시에 잠들고 늦은 아침에 일어나는 게 지난 주의 내 삶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고 나니 밤 열두 시가 되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금세 바뀐 생체 리듬이 나를 자꾸 늦은 밤에도 움직이라 명령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자야 하는데 생각은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면증과 늦잠과 두통이 한 덩이로 반복되며 나를 지배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제부터는 일부러 커피를 줄이고, 몸을 피곤하게 놀리고, 다시 예전의 패턴을 찾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했다. 뒤척이다 잠이 들어 아침엔 몸이 너무 무거웠지만, 그래도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하루를 가까스로 시작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첫째도 학교 돌봄에 보내고, 오랜만에 글쓰기 모임을 하고 카페 문도 열었다. 요즘 섬 날씨는 봄날 같아 한낮이면 십 도에 육박하고 온화한 햇살이 미세먼지와 함께 흩뿌려지곤 한다. 먼지를 들이마시면서도 햇살의 안온함에 사로 잡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쉰다. 아이가 돌아오면 아이도 챙기고 손님도 맞아야해 분주하지만, 이만큼이라도 되찾은 게 어디야.
손님이 있든 없든,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문을 열고 쓸고 닦는 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자리를 지키는 건 자리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한 것. 그 의무감이 한없이 게을러지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 작은 차이가 내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 다시 나를 살게 한다. 흐트러진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일상이라는 작은 기적을 마주한다. 그리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보통을 조금 웃도는 적절함을 담아 작게 읊조린다. 이보다 더 적확할 수 없는 단어로. 좋다. 딱 그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