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by 박순우

에세이를 주로 쓰지만 에세이 책을 주로 읽진 않는다. 글쓰기 모임도 한다더니 이게 웬 배신인가 하겠지만, 거짓을 말할 순 없다. 소위 문학이라고 말하는 분야에서 에세이는 사실 대우받는 분야가 아니다. 내가 문학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기류는 심심찮게 엿볼 수 있다. 시나 소설에 비해 에세이는, 쓰는 사람도 글도 작가나 작품이라 잘 불리지 않는다. 쉬이 쓰이는 글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직업의 경계를 넘어 쓰는 이가 많기 때문일까. 여전히 틀에 박힌 생각들이 참 아쉽다.


나는 에세이를 자주 읽진 않지만, 원하는 순간에 읽는다.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읽기 위해 때를 기다린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듯하다. 에세이는 다른 책에 비해 장벽이 없다. 사전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소설처럼 등장인물이 많거나 낯선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서 금세 집중할 수 있다. 순서를 따지지 않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어내려가도 상관이 없다. 쉽게 읽히고 빨리 읽히니, 머리가 무거울 때나 일상의 작은 틈새에, 혹은 독서를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에세이를 꺼내든다.


출판시장에서 에세이는 가장 잘 팔리는 분야가 된 지 오래다. 대형서점에서 에세이 코너에 가면 처음 보는 에세이들이 넘쳐난다. 에세이 전문 작가가 쓴 것도 있지만,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나 평범한 시민들이 쓴 책도 많다. 누군가는 이런 에세이 시장을 보고 수준 낮다고 깔볼지도 모른다. 어려운 글은 읽지 않는다며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장이 형성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에세이는 독자에게 쉼이 될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내가 에세이를 쉬어갈 때 주로 읽는 것처럼, 삶의 휴식이 필요한 이들이 이 땅엔 유독 넘쳐나기에 에세이가 그리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한국 사람들이 카페를 선호하는 것에 대해, 유현준 건축가는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마당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한 적이 있다. 마당처럼 햇살이 내리쬐고 아늑하며 편히 앉아있을 수 있는 현대인의 공간이 카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더 예쁜 카페를, 더 편한 카페를, 멀리 외곽에 있더라도 풍경 좋은 카페를 찾는 게 아닐까. 현대인에게 카페가 몸의 휴식 공간이라면, 에세이는 마음의 휴식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렇다면 에세이는 왜 마음의 휴식이 될 수 있을까.


에세이의 소재는 어느 술집의 안주 이름처럼 '아무거나'이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덮고 있는 담요가 될 수도 있으며, 먹은 밥이나, 겪은 사소한 일도 에세이의 글감이 될 수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다'는 말처럼 에세이는 그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해, 그 안에서 자신만의 통찰을 발견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보통 쓰인다.(물론 모든 에세이가 그렇지는 않다.) 일상의 작은 관찰과 발견이라는 에세이의 시작은 독자가 글로 들어가는 장벽을 낮춘다. 익숙함은 순식간에 그 세계에 빠져들게 하고, 그 속의 작은 통찰은 깨달음이나 안도를 느끼게 한다.


에세이가 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에세이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의 삶도 가볍기만 할 리 없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글감을 찾는 게 에세이다 보니, 한없이 가벼울 수도 있고, 한없이 묵직할 수도 있는 것. 어떤 에세이는 한 인간이 온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며 부딪혀온 지난 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도 하다. 하나의 글이 그럴 때도 있지만, 한 권의 에세이가 통째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는데, 후자의 경우 덮고 나면 오랜 여운에 잠긴다. 한 사람의 삶을 읽어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에세이를 그저 쉼으로 받아들여온 사람도 있고, 에세이를 삶이라 느껴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에세이를 전자로만 인식해 쉬이 쓸 수 있는 글이라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에세이는 사실 그리 쉬운 글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작은 것에서 하나의 의미를 끌어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 만천하에 나를 드러내야 한다. 좋은 글이 되려면 숨김 없이,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쉬울 리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일수록 더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에세이를 꾸준히 쓰는 건 사실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해서,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겁 없이 계속 써야만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에세이를 쉼이라 여기는 건, 사실 시중에 나온 에세이 중 전자의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드물다.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을 쓸 수 있다는 건, 내 안에서 그 아픔이 모두 소화가 됐다는 걸 의미한다. 건드려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상태라는 걸 뜻한다. 소화하지 못한 아픔은 글로 쓰더라도 미완성이 되고 만다. 내게도 그런 아픔이 있다. 이따금 꾸역꾸역 써내지만 쓰고 나면 며칠을 앓는다. 아픔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시기가 되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를 꺼낼 수 있다. 그런 에세이는 독자들에게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삶을 걸고 썼기 때문이다. 이런 글이 독자의 외면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나쁘고 후자가 좋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둘은 엄밀히 따져보면 다른 글이다. 같은 에세이지만, 무게도 방향도 독자도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전자의 글을, 누군가는 후자의 글을 읽고 싶어 한다. 어떤 글은 전자로 시작하지만 후자로 방향을 틀기도 한다. 분명한 건 둘은 서로 다르고, 둘은 모두 이 세상에 필요한 글이라는 점이다. 쓰는 사람은 글감에 따라, 나의 상태에 따라 방향을 선택하면 된다.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깨달은 건, 글쓴이는 결국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쓴다는 것이다. 지금 머릿 속을 가장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주제를 향해 끝내 나아간다. 어떤 글감이 주어지더라도.


쉽게 읽히는 글은 있지만, 쉬운 삶은 없다. 쉽게 읽히는 글이라 해서 쓰는 것도 쉽게 쓰였을지는 알 수가 없다. 한 문장 한 문장 턱턱 걸리는 날에도 꾸역꾸역 글을 쓰는 건, 이 글이 내게는 어렵지만 독자에게는 쉬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벼운 글도 무거운 글도, 쉼 같은 글도 삶 그 자체인 글도, 모두 괜찮다. 글은 하나하나가 작품이지만, 긴 인생에서는 그 모든 글이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작품이 될 것이기에, 두려워말고 그게 무엇이든 각자가 오늘의 글을 썼으면 좋겠다. 내가 그동안 에세이를 읽고 쓰면서 깨달은 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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