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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Feb 28. 2023

보면서 먹는 것에 대해

어른이 아이의 오감을 막는 게 아닐까

이 시대 평범한 보호자가 아이를 키우는 법


0-1살

아이가 너무 어릴 때는 가까운 식당이나 카페에도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제 유아차도 제법 잘 타고 발자국도 한 걸음씩 떼니 슬슬 집밖으로 나가봐야겠다. 커다란 가방에 기저귀, 젖병, 놀잇감, 간식 등을 잔뜩 챙겨넣고 집을 나선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집에 들어선다.


분명 식당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소리를 낼 때마다 옆 테이블, 앞 테이블에서 따가운 눈총을 주는 게 보인다. 놀잇감을 꺼내 흔들어도 보지만 아이가 집중하는 건 잠시 뿐이다. 간식도 쥐어주지만 얼마 못가 내팽개쳐 버린다.


기저귀도 아직 여유가 있고 우유를 먹을 시간도 아니건만, 아이는 내 품에서도 유아차 안에서도 몸부림을 친다. 남편과 번갈아 가며 안아도 보고 달래도 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만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후다닥 해치우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집이 최고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듯 방실방실 웃으며 잘만 논다. 나는 언제쯤 편하게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까.


2-3살

생후 2년 동안은 동영상을 보지 않는 게 좋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집은 단언컨대 하나도 없다. 동영상이라도 틀어놔야 아이 입 안에 음식을 밀어넣을 수 있고, 나도 잠시 쉬어가며 밥을 먹을 수 있다. 이 좋은 걸 왜 몰랐을까. 동영상 없이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제 스마트폰과 태블릿만 있다면 아이와 어디든 갈 수 있다.


아이가 음악에 맞춰 들썩이기도 하고, 나오는 소리와 동작을 익히니 영상 시청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저것 가리는 게 많은 아이가 영상을 틀어주면 별 생각 없이 주는대로 음식을 받아 먹는다. 골고루 먹일 수 있으니 아이에게도 더 좋은 게 아닐까. 아이 영상이 끝났다. 얼른 다음 영상을 재생해야겠다.


4-10살

아이는 이제 식당에 가면 뭘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 몫의 태블릿을 세워두고 자신이 보고 싶은 영상을 고른다. 나는 그런 아이 입으로 음식을 밀어넣는다. 혼자 먹을 수 있는 아이이기는 하지만, 아이가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니, 그러다 내가 맘충이 될 수도 있으니, 내가 먹여주는 한이 있더라도 영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영상만 있으면 아이는 순한 양이 되고, 나도 마음이 놓인다. 아이에게 공중도덕을 굳이 힘들게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조용히 제자리에 앉아있다. 타인에게 피해도 가지 않고, 나도 편히 있을 수 있으니 영상을 끊을 마음은 없다. 요즘 세상에 식당에서 디지털 기기 하나씩 안 끼고 있는 아이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서비스업 종사자가 바라본 모습


11-13살

이제 아이가 영상을 보면서 밥을 먹을 때는 지난 것 같은데, 이 가족은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들이 각자의 태블릿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는 보호자. 각자 음료를 마시며 각자의 온라인 세상에 빠져있다.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카페를 둘러보지도 않는다. 맛을 음미하기는 할까. 그렇게 한두 시간을 말 없이 앉아있다 나가는 가족. 저 가족은 우리 카페의 위치와 분위기, 맛을 기억할 수 있을까.


또다른 가족이 왔다. 역시나 아이들이 앉자마자 디지털 기기를 꺼내 게임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주문할 생각도 별로 없어 보인다.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기기를 켜서 엉덩이를 제대로 의자에 밀어넣지도 못한 상태로 게임을 시작한다.


음료와 케이크를 내갔다. 케이크를 정신 없이 한 입에 털어넣고 음료는 한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다. 얼마 안 가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놀라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아이에게 내간 음료 잔이 산산조각 났다.


아이는 컵이 깨졌다는 걸 알면서도 손과 눈을 멈추지 않는다. 옷이 젖은 채로, 발 아래 음료와 깨진 유리조각이 밟히는 채로 게임을 계속 한다. 보호자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조심 좀 하지. 상당히 부드러운 말투로 한 마디 할 뿐이다. 게임을 멈추라는 말도 하지 않고, 기기를 뺏지도 않는다. 사과를 하지도, 시키지도 않는다.


치워야 해서 자리를 좀 옮겨주시겠어요. 아이와 어른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자리를 옮긴다. 심지어 아이는 게임을 하면서 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아이의 점퍼 자락에서 음료가 뚝뚝 떨어진다. 아이는 서서 게임을 하고 엄마는 아이의 옷을 닦는다. 아이는 흔들림 없이 게임만 한다.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유리조각을 줍고 음료를 닦는다. 손이 벨까봐 조심조심한다. 다른 손님이 들어온다. 잠시만요. 양해를 구한다. 음료를 밟은 발로 자리를 옮겨 여기저기 음료가 옮겨져 있다. 유리를 다 치운 뒤 음료를 닦아내고 대걸레로 카페 온 바닥을 청소한다. 닦으며 생각한다. 아이는 내가 자신이 쏟은 음료를 닦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면 식당이나 카페에서는 아무리 음식을 쏟고 그릇을 깨도 자신이 할 일은 없다고 배울지도 모른다.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



보호자이자 서비스업 종사자의 생각


요즘은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디지털 기기에 시선을 뺏긴 채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손쉽게 만나볼 수 있다. 식당에서 '보는 건'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일이 되었다. 먹으려면 보는 게 당연한 세상. 먹이기 위해 보여주는 세상. 아이들이 식당에서 혹시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봐, 혹은 부모가 편히 밥을 먹기 위해, 골고루 잘 먹이기 위해 하는 행동일 것이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다만 물음표가 그려진다. 보는 게 '꼭' 필요한가. 꼭 보여줘야만 아이들이 얌전히 앉아있고, 식사를 잘 할까.


카페에서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디지털 기기 사용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고, 나와 남편도 각자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본다. 일종의 따로 또 같이 보내는 휴식시간인 셈이다.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음식점에서는 디지털 기기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함께 메뉴판을 보며 먹을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식당을 둘러보며 구경을 한다. 서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배가 고파 빨리 밥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보통 짧으면 십 분, 길면 이십 분 정도다. 수저를 놓고 물을 채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간다. 밥이 나오면 열심히 먹는다. 이 음식과 저 음식의 맛을 비교하고, 입에 맞는 음식은 더 덜어 먹으며 함께 식사를 한다. 보통 아이들의 식사가 어른들보다 먼저 끝난다. 어른들은 아이의 음식을 잘라주거나 덜어준다고 조금 늦게 식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먼저 식사를 끝낸 아이들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아직 엄마 아빠는 식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둘러보기도 하며 그 시간을 견딘다. 그리고 어른의 식사가 끝나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이가 정말 어리고 통제가 안 되던 1-3살 무렵을 지난 뒤로, 아이들과 외식을 하면서 디지털 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나 아이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기기를 주지 않은 건 습관이 될까 두려웠고, 무엇보다 아이가 공간의 분위기를 느끼며 음식의 맛을 음미하고, 함께 먹는 기쁨을 느끼길 바랐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섬에 놀러 온, 아이를 키우는 친구 하나가 내게 말했다. 식당에서 영상 안 보여주는 사람 처음 봤어. 정말 나는 희귀종인 걸까.


음료를 쏟고 컵을 깨도 흔들림 없이 게임을 하는 어린이 손님을 마주한 뒤로, 우리는 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음식을 먹는 건 단지 영양소를 섭취하는 걸 넘어서는 행위다. 게다가 그게 외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집과는 다른 새로운 공기와 음악 속에서, 다채로운 식재료의 향을 느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나열된 음식들의 맛을 비교하며, 배를 채우는 동시에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아이들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 공간을, 그 맛을, 그 향을, 그 사랑을, 만끽할 권리. 아직 어린 내 아이가 타인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예측과 맘충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마음에, 혹시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할 권리를 어른이 막아서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디지털 기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세대의 아이들이라고는 하나, 적어도 먹으면서 보는 행위는 막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무법자가 아니다. 아이들이 늘 예상치 못한 행동만 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도 타인을 의식할 줄 알고, 공동 생활을 통해 공중도덕을 배운다. 아이들은 모든 것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함께 먹는 것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식문화를 배우고, 나라마다 다른 음식을 알아가며, 다양한 맛의 세상에 눈을 떠간다. 아이들의 오감을 막고 있는 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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