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명절만 되면 친가로 외가로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이 부러웠다. 더 정확히는 갈 시골집이 있음이.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우리 집은 큰집이었다. 할아버지는 맏이였다. 부모님은 맏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러니 명절이 되면 나는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머무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은 귀성길, 귀경길로 몸살을 앓는 뉴스를 보며 저렇게 고되게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외가도 도시였다. 차례를 치르고 밥상을 치우고 나면, 부모님을 따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차에 올랐다. 짧게는 수십 분, 길게는 한 시간 남짓이면 외가에 도착했다. 또래 사촌들이 많은 외가의 방문은 늘 즐거웠지만, 좀 아쉬운 공간이기도 했다. 왜 내게는 시골집이 없을까. 친가든 외가든 하나라도 시골에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내 안에 단단히 박힌 시골집 로망의 씨앗은 이때 심어진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이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마음의 안정을 느끼고 싶을 때면 상상하곤 했던,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공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이 충만해지는 세계. 그곳에는 로망의 공간인 아담한 시골집이 놓여있다.
전형적인 옛날 한옥 구조의 집은 화려하기보다 허름에 가깝지만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다. 살림살이들은 세심하기보다 투박하고, 방문과 창은 모두 경계 없이 활짝 열려 있다. 거실과 마당을 잇는 곳에 긴 툇마루가 있다. 계절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과 여름 사이 어디쯤. 날씨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한낮이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두 무릎을 가슴으로 바짝 끌어당겨 품으로 안는다. 그 위에 포근한 담요를 덮어 감싼다. 담요에 턱을 괴고 정면을 초점 잃은 눈으로 응시한다. 그 어디에도 재촉하는 사람은 없고, 나는 혼자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봄에 한껏 자란 연둣빛 잎들이 점점 진한 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햇살은 잠자코 있던 생명들을 깨우기도 하고 자라게도 한다. 연둣빛만이 새살이라는 걸 수줍게 증명한다. 햇살이 깊어지면 잎들은 점점 단단하게 짙어진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벌려 온몸으로 비를 맞는다. 생명수가 쏟아지는 풍경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그 속의 세상은 온전한 제 색을 띤다. 푸른 것은 더 푸르러지고, 붉은 것은 더 붉어지는 풍경.
나는 그 싱그럽고 생생한 푸른 얼굴들을 바라본다. 귓속으로는 끊임없는 비의 노래가 들려온다. 비가 대지를 향해 내리꽂으며 발산하는 규칙적인 반주에, 처마 끝에서 굵어진 빗방울들이 툭툭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멜로디처럼 더해진다. 포장되지 않은 흙투성이 마당으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튀어 오를 때마다, 흙내음이 그 반동을 타고 공기 중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내음과 흙내음이 섞여 콧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티끌 없는 공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가며 내 몸도 더불어 맑아진다.
봄과 여름 사이, 연두와 초록 사이, 집과 마당 사이, 공기와 빗물 사이, 규칙과 불규칙 사이, 응시와 멍 사이. 머릿속에만 담겨있던 풍경을 글로 옮기고야 알아챈다. 모두 사이에 놓여있구나. 계절도, 색깔도, 자리도, 공기도, 소리도, 내 머릿속마저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완연한 날들을 좋아한다. 더 이상 찬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완연한 봄,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어도 두렵지 않은 완연한 여름,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는 쓸쓸하지만 완연한 가을,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고즈넉한 한기의 완연한 겨울까지.
그런데 정작 내 마음속 로망의 공간은 완연하지 않다. 명확하지 않음이 오히려 묘한 안도를 느끼게 하는 이유는 뭘까. 그러고 보면 완연하다 믿었던 것들도 사실 모두 한낱 순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주하지 않는다. 목숨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절도 색깔도 인간이 명명했기에 명확히 존재한다 여겨지는 것뿐, 본래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는 규정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손길이 만들어냈을 뿐이다.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 물끄러미 멈춰있는 순간을 나는 꿈 꿨는지도 모르겠다.
갈 시골집이 없어 스스로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됐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엉뚱하게도 막상 내 집을 지을 땐 한옥풍 툇마루의 집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초록 지붕 다락방 달린 집만 떠올랐다. 앤이 힘껏 창문을 들어 올리며 환한 얼굴을 삐죽 내밀던 장면과, 그 창 아래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던 장면만이 선명했다. 초록 지붕은 아니나 다락방이 있는 집을 짓긴 했다. 문제는 다락이 여름엔 덥고 겨울엔 너무 추워 자주 가지 않는다는 것. 한옥을 짓는 건 무척 돈이 많이 들어가 애초에 엄두도 낼 수 없었고. 로망과 현실은 이렇게 다르다.
시골집에 살면서도 이따금 시골집을 꿈꾼다. 다음에 집을 또 짓게 되면 그때는 꼭 툇마루를 만들거라 다짐하면서. 비가 쏟아지는 봄도 여름도 아닌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푸른 나무들과 쏟아지는 비를 초점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가만가만 솟아오르는 온갖 세상의 향기들을 내 안으로 끌어당기겠노라고. 현실로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순간을 만나리라는 꿈을 꾼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솟아 나온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를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도 흘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