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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안 나온다

by 박순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저번 감기에도 뒤끝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생을 했는데 또 그런다. 며칠째 꼭 해야할 말이 아니면 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소근소근 말을 하거나, 도리도리 혹은 손가락질로 대신해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굳이 목소리를 내자면 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목을 아끼는 이유는, 내일부터 다시 책 읽어주는 선생님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기관지가 약하다. 섬은 습도가 높은 편이라 그나마 덜하지만, 육지에 살 때는 가습기를 끼고 살았다. 특히 주기적으로 방송을 하던 때에는 목 관리가 필수여서, 환절기만 되면 감기에 걸릴까 노심초사했다. 그런데도 운 나쁘게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데다 대타 인력도 없는 날이면, 안 나오는 목소리로 방송을 한다고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올해 내가 맡은 학년은 4학년, 전교생 가운데 가장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많이 읽는 학년으로 유명한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봉사를 하기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나는, 아이들보다도 책이나 작가를 모른다. 열심히 따라가고는 있지만, 워낙 책 세상이 방대하다보니 하루 아침에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 추천도서며, 선배들 곁눈질을 하며 책을 선정하고 있다. 4학년이다 보니 그림책도 읽지만 줄글로 된 책도 선택해 읽을 생각이다.


책은 잔뜩 빌려다놓고 이것저것 읽을 생각에 부풀어 있는데 목소리가 영 나오지 않는다. 잘못해 기침이라도 시작되면 연이어 켁켁 거린다. 다른 보호자에게 부탁을 해도 되지만, 새학기 들어서 처음으로 책을 읽어주는 날이라 포기하기가 어렵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외고, 책 읽어줄 때의 반 분위기를 가늠해보고 싶은 욕심에 목에 좋다는 온갖 것들을 섭취하며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래저래 무리하기도 했다. 책만 읽어주면 될 줄 알았는데, 매년 치러지는 책축제 행사 준비 멤버로도 들어가게 됐다. 학교 일이라는 게 늘 하는 사람만 하다보니, 항상 손이 부족하다. 때마다 자처해서 봉사하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나만 쏙 빠진다는 말이 입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 정도 고생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관련 회의가 계속 있다보니, 아무리 말을 아끼고 아낀다 해도 목을 써야하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따뜻한 차를 물병에 담아 들고 다니며 수시로 마시고, 목캔디 따위의 도움도 받고 꾸준히 감기약도 먹지만, 미세먼지 때문인지 목이 쉬이 낫질 않는다. 오프라인 글쓰기 모임도 해야 해서 목 쓸 일이 천지인데, 답답하기만 하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 아침은 좀 나아질까 기대를 하며 매일 밤 잠이 든다. 내일 책 읽어주는 동안만이라도 목이 버텨줬으면 좋겠는데, 과연 괜찮을지.


쓰던 감각 하나가 고장나면, 바보처럼 그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뚫린 목이고 달린 입이라 실컷 쓰고 대충 썼는데. 방송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도 소중한 약속이니 아무래도 목관리를 평소에 해야할 것 같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목으로 하는 일이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도, 커피를 팔며 손님과 대화 나누는 것도, 책을 읽어주는 것도. 읽고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눈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 너무 혹사시켰구나. 곧 노안이 올텐데, 하며. 집 안팎으로 일을 많이 한 날에는 두 손에게도 미안하다. 바꿔 낄 수도 없는 손목, 늘 부실한데 말이지. 인생은 길고 몸뚱이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구나.


부디 내일 아침엔 목소리가 잘 나오기를. 책 읽어주는 동안만이라도 말짱하기를. 혹시 상태가 안 좋더라도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잘 조절해 별 탈 없이 마무리하기를. 그마저도 힘들 땐 도움을 요청할 수 있기를. 봉사도, 글쓰기 모임도, 내가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조금씩 해보려 시작한 일들인데, 한꺼번에 닥치니 정신을 못 차린다. 도움의 손길을 잘 내밀지 못하는 뻣뻣한 사람이라는 게 이럴 땐 참 뼈아프다. 무리하지 말고 손을 뻗어봐야지. 도움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를 바꾸는 일은 해도해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또 바꿔봐야지. 내 삶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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