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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10. 2023

뒤늦은 그림책 사랑

  초등학생들은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갈까. 한 달 뒤 열리는 아이 학교 책축제에서 얼떨결에 고민상담 부스를 맡게 되었다. 작년에 반응이 좋았다며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교장선생님의 권유에, 올해 다시 진행하게 된 코너다.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고민을 적게한 뒤, 고민에 대한 답장과 처방책을 책축제 당일날 전달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일일이 답장을 쓰고 맞춤 책을 고르는 데 시일이 오래 걸려, 지난 주 부랴부랴 고민 종이부터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작년에 해봐서 그런지 제법 능숙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 어떤 아이들은 제출하면서 절대 누설하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받은 고민 내용을 학년별로 엑셀에 정리하고, 틈 나는대로 답장을 쓰며 맞춤 책을 고르고 있다.


  아무리 시골학교라 규모가 작다지만, 일흔 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챙기는 일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담당하게 된 보호자 한 명이랑 열심히 역할을 나눠서 준비를 하고 있다. 완전한 고민 해결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심경을 나누며 조금이라도 짐을 덜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꼼꼼히 아이들의 고민을 읽고 있다.


  아이들의 고민은 비슷한 것도 있지만, 무척 독특한 것도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고민 중 하나는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형제자매 때문에 힘들다, 아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 엄마가 화를 자주 낸다. 벌써부터 돈에 대해 고민하는 아이들도 상당수였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부자가 되고 싶다, 현질을 100억 원 정도 하고 싶다. 따돌림을 당할까 걱정하는 사연과 형제자매가 많은 집이라 힘들다며 외동이 되고 싶다는 고백은 유독 아프게 다가왔다.


  공부에 대한 고민을 비친 아이들도 있었지만, 시골 학교라 그런지 비율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거나 초능력을 갖고 싶다는 의견도 간혹 눈에 띄었다.(우리 아이의 사연이었던 건 안 비밀...) 가장 많은 건 예상 외로 고민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고민이 없다니! 심각한 고민을 적은 아이에게 답장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민이 없다는 아이에게 답장을 쓰는 건 더 난해한 일이었다. 생각을 알 수 없으니 맞춤 책을 찾는 것도 어렵다. 학년에 맞게, 아이 평소 이미지에 어울리는 책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보면 하루는 훌쩍 지나간다.


  책 읽어주는 선생님을 하면서 아이들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참 좋은 책이 많아서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내가 어릴 적엔 그림책 다음엔 바로 그림 하나 없는 건조한 줄글책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 아이들 책은 단계별로 글자 크기나 그림이 적절하게 조절되어 있다. 내용도 오래된 클래식한 이야기부터 다채로운 동화, 생생한 현실이 느껴지는 소설, 판타지나 이솝우화 뺨치는 내용들까지 정말 다양하다. 이런 책이 내가 어릴 때에도 있었다면 나는 좀 더 책을 많이 읽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까. 일찍 태어난 게 억울할 정도다. 그런데도 책은 스마트폰에 밀리겠지만.


  그림책 중에서는 소장하고 싶을 만큼 근사한 그림과 이야기가 펼쳐지는 책들도 상당수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도 있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어도 좋을 만한 책도 무척 다양하게 출판된다. 이런 책들만 모아서 따로 작은 책방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탐이 난다. 좋은 책이 보이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림책은 누구나 경계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글이 많지 않아 난독증이 있거나 줄글책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림도 작품들마다 가지각색이어서 그림 감상만으로도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이를 다독이듯,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책이 많다보니 읽으면서 자주 상념에 빠져든다.


  여행지에 온 사람들은 유난히 지쳐있는 이들이 많다. 도망을 치듯 날아온 사람들, 간신히 시간을 쪼갠 이들, 조금이라도 더 보려하거나 조금이라도 더 쉬려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카페 한쪽에 그림책을 들여볼까, 그림책방을 내볼까. 그림책이 좋아질수록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곤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당장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여행객들에게 마음 편히 쉬어가는 공간을 제공하고 싶었던 초심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그런 내 마음에 그림책이 와닿은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


  아이들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만한 책을 고르면서, 힘들지만 따뜻한 마음이 솟아난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그저 읽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안의 숨은 뜻을 발견하고 더 발전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조금이라도 더 고민을 들어주고 맞는 책을 찾아주는 것으로 우선은 만족을 해야겠지.


  작년에는 고민상담소에서 답장과 처방책을 받은 뒤, 진짜로 고민이 해결됐다는 아이들이 나오기도 했단다. 플라시보 효과라도 나타난 걸까. 아이들이 위대한 건 어른보다 빨리 받아들이고, 잘 바뀐다는 점이다. 그런 유연한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텐데. 섣부른 욕심이 들어 자꾸 나를 돌아본다. 천천히 가자고. 이제 시작이라고. 섬세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림책처럼 나도 아이들의 마음을 토닥여야지, 다짐하게 되는 날들이다. 그나저나 언제 다 하지. 세상은 넓고 책은 많고 내 앞에 쌓인 일도 잔뜩이구나. 그래도 행복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내 안에 아직도 꿈틀대는 소망이 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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