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Apr 28. 2023

두 글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소설. 두 글자가 글감으로 정해졌을 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올 게 왔구나. 몇 년째 내 머릿속 귀퉁이에 살고 있는 단어, 소설. 두 글자는 항상 꼬리표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를 성가시게 한다. 가끔은 아예 눈앞을 가로막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영영 떠나보내거나 한바탕 정면으로 대거리를 해봐야 이 상황이 끝날 텐데, 어느 쪽도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평소 선택의 갈림길에서 빠르게 결정한 뒤 그대로 직진하는 나의 성격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 모습이다.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글옷. 함께 글을 쓰던 언니가 소설가가 됐다. 그냥 소설가도 아니고 30만 부가 넘게 팔린 책의 작가가 되었다. 언니의 소식을 듣고 샘이 나기는커녕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선배가 옆에 있다는 게 반갑고 고마웠다. 우리는 십 년 전 소설반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오랜만에 닿은 연락에서 요즘 에세이를 주로 쓴다는 내 말에 언니가 대답했다. 자신에게 맞는 글옷이 따로 있지. 글옷이라는 단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시, 소설, 에세이... 내게 맞는 글옷이라.  


  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적어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것처럼 언니는 세상에 없던 사람과 사연들을 글로 생생하게 풀어내곤 했다. 언니의 초창기 글에는 신기하게도 십 대 남자아이가 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언니가 청소년문학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릎을 쳤다. 언니에게 너무나 잘 맞는 글옷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기 전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면 내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모방은 잘 하지만, 창조는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오래 생각해 왔다. 소설이라는 이야기도 모방이 시작이겠지만, 내게는 창조의 영역에 더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일까. 머뭇거리기만 하고 도무지 다가가질 못한다.  


  박완서 작가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마흔의 나이에 소설 <나목>으로 등단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막연히 나도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면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해 왔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게 거짓말처럼 마흔이었다. 둘째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나는 내년부터 소설을 쓰면 되는 걸까. 그나저나 내 글옷은 소설이 맞을까. 내가 소설을 쓸 깜냥이 될까. 그냥 쓰면 되는데 이리 생각이 많으니 결국 길을 잃고 만다.


  에세이만 써도 되는데 소설을 자꾸 기웃거리는 건, 에세이만으로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내 삶과 내 사유'라는 둘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에는 경계가 없다. 어떤 이야기도 소설의 형식을 빌리면 꺼낼 수 있다. 에세이가 내 얼굴을 정면에 내놓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소설은 다른 인물의 얼굴과 상황으로 이야기하기에 더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다. 정곡을 찌르거나 예민한 부분을 파헤치거나, 금기시되는 걸 말할 수도 있는 것.


  더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더 다양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 소설을 여태 붙들고 있다. 꼭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어도 내 세계관이 분명해지면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에세이와 달리 소설은 긴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데,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나도 그렇게 집중할 시공간적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기도 한다. 


  내가 지금까지 쓴 건 몇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이야기도 여럿이다. 결국 마무리를 짓는 사람이 소설가가 된다고 믿는다. 누구나 꿈을 꿀 수 있고 시작도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끝을 낼 수는 없다. 시작은 용기와 영감으로 할 수 있지만, 끝을 내는 건 반복적인 훈련과 명확한 세계관, 그리고 자기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는 인내가 있어야 가능하기에. 


  매일 쓰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지금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것처럼, 나는 다시 새롭게 도전할 수 있을까.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그저 쓰겠다 다짐한 뒤 떠올린 건 하나였다. 후회하지 않을 때까지 쓰리라.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보리라. 도전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리라는 걸 안다.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면 미결된 사건처럼 평생 찝찝함을 안고 살게 되리라는 것도. 나는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나는 나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야 결국 해방될 것이다. 소설이라는 두 글자의 굴레로부터. 


  답은 하나라는 걸 안다. 그저 쓰는 것. 가슴이 뛴다. 다시 출발선 앞이다. 눈앞에 소설이 아닌 내가 서있다. 내가 뛰어넘어야 하는 건 단 하나, 늘 나 자신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소설'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할 나위 없는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