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이가 된다

by 박순우

동아리 회의에 불참했다. 매주 수요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나면 회의를 하는데 이번 주에는 빠졌다. 이유는 병원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이런 상황에서 빠진다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꾸역꾸역 해낼 수 있는 건 다 해내는 사람. 그 뒤에 남는 시간, 그제야 정신없이 몰아치듯 나의 일을 해치우는 게 미련한 나란 사람이다. 오랜 시간 내게 우선순위는 철저히 타인이었다.


삶을 다시 배우고 있다. 거절하는 방법을 익힌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쏟아졌을 때, 선 긋기. 그건 제가 할 수 없어요. 이유를 설명하고, 빠져나오기. 뒤에서 잡음이 들린다 해도 신경 쓰지 않기. 잡음은 생성한 사람의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니. 타인의 칭찬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연습하고 있다. 예전에는 누가 나를 칭찬하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에이 아니에요, 제가 뭘요. 뒤따르는 부끄러움 가득한 언어. 이제는 누가 칭찬을 하면 당당히 말하려 한다. 감사합니다!


배려에 대해서도 정의를 다시 내린다. 배려는 타인을 너무 많이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관심을 적당히만 두는 것이라고. 손님이 오면 상다리가 부러질 듯 한 상이라도 차려내야만 했던 나는, 이제 손님이 오면 대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갈 때마다 진수성찬인 집은 불편하다. 그저 있는 것 몇 개 내어놓는 상. 그저 같이 한 술 뜨고 마는 집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종종 집에 놀러 와 묵고 가는 동생이 하나 있다. 방 하나만 내어주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알아서 먹겠거니, 알아서 오고 가겠거니. 동생이 말한다. 친누나네보다 이 집이 더 편해.


아이들은 자주 다툰다. 싫고 좋은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가 하자는 놀이를 둘째는 거부한다. 둘째가 하고 싶어 하는 놀이를 첫째는 싫어한다. 그러니 둘은 매일 티격태격. 의견이 맞는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친다. 아직 사회화가 덜 된 아이들을 볼 때면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싸움이 너무 잦아질 때면 힘들지만,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어른이 된다는 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 텐데. 일찍 애어른이 된 나는 의사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다. 타인 앞에서 늘 미소 짓고, 긍정하는 사람으로 아주 오래 살았다. 거절을 할 줄도 모르고 온갖 정성을 다해 배려하고, 칭찬을 받으면 몸이 배배 꼬였다. 아이들을 보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을 나도 배운다. 거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칭찬을 당당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알아간다.


다시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세상이 흥미로워 공부가 재미있다. 타인의 눈치를 덜 보기 시작하면서, 내 의사 표현을 크게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싫은 소리를 들어도 금세 잊어버린다. 고칠 게 있으면 바로 고치려 노력하고, 걸러야 할 말이라면 흘려버린다. 왜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를 믿고 아이에게 배워라'라고 했는지, 왜 성경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는 말씀이 적혀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연세가 지긋한데도 아이의 눈빛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작은 것에도 놀랄 줄 알고,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누구에게 무엇이든 배우려는 사람들. 내면의 아이를 잃지 않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어, 내 안의 어린아이를 자꾸 어루만진다. 아직 살아있어도 된다고. 더 배우고 깨우치며, 더 감동하고 더 순수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그러면 분명 삶이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삶은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다시 아이가 된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나이'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유와 구속 사이 어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