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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ug 11. 2023

네가 자라야 할까, 내가 자라야 할까

둘째가 두 살 무렵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호텔에 있는 커다란 편백나무 욕조에서 아이들을 놀린 적이 있다. 호텔에 문제가 좀 있어 나는 프런트에서 직원과 이야기 중이었고, 남편과 한 친구에게 아이 둘을 돌봐달라 부탁을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방으로 가니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욕실에서 아이들이 넘어질까 봐 남편은 바닥에 타월을 잠시 깔고 있었는데, 그 사이 둘째가 앞으로 고꾸라져 얼굴이 물에 잠긴 것이다. 재빨리 일으켰고 얕은 물이었지만, 어린 둘째에게는 꽤 공포였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둘째는 물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물놀이를 마냥 좋아했는데. 집에 있는 욕조에 물을 받아줘도 싫다고 발버둥을 쳤다.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물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는 듯했다. 집에서 첫째랑 함께 하는 물놀이를 점차 즐겼다. 문제는 엉뚱하게 어린이집에서 불거졌다. 여름이면 어린이집은 아이들을 위해 물놀이 행사를 마련하곤 하는데, 아이가 이를 극구 거부한 것이다.


에어바운스로 된 워터 슬라이드 등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시설이 잔뜩이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혼자 평상복을 입고 풀장 밖에서 물놀이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선생님들 여럿이 돌아가며 들어가 보라 권했지만,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이런 아이는 처음 보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아이는 가져간 수영복을 입지도 않고 마른 채로 다시 집으로 갖고 돌아왔다. 신나서 첨벙거리는 친구들을 지켜보면서 아이는 내내 어떤 마음이었을까 싶어 가슴이 조여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작년부터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하는 물놀이를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선생님도 나도 녀석이 이제야 어린이집에 완전히 적응을 한 모양이라며 좋아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물총을 쏘고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마음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기쁨도 잠시, 올여름 들어 아이는 다시 어린이집에서 하는 물놀이를 거부하고 있다. 친구들이 물놀이를 하는 동안 아이는 혼자 교실에서 머문다. 물놀이를 하는 날이면 하원한 아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혼자 하는 놀이가 좋았을 리 없으니.


아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내게 묻는다. 어린이집에서 내일 물놀이하면 어떡하지. 이미 선생님에게 물놀이를 모두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말해도, 아이는 불안한지 자꾸 내게 되묻는다. 원래도 불안 증세가 있는 녀석인데 여름을 지나면서 아이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물놀이하면 어쩌지",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눈을 마주칠 때마다 매번.


처음에는 그런 아이가 안쓰러워, 질문과 짜증을 묵묵히 받아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날들이 보름을 넘어가니 한계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첫째도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만 좀 하라고. 아이는 급기야 내게 자신이 왜 어린이집에 가야만 하는지를 따져 물었다. 왜 일주일에 5일이나 가야 하는지, 하루에 8시간이나 어린이집에 있는 건 어린아이에게 너무 긴 게 아닌지, 혼자 집에 잘 있을 수 있는 자신이 왜 어린이집을 가야 하는지.   

  

어떤 회유와 분노와 설득에도 아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낳았지만 참으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인내심이 바닥나 있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평일 하루 어린이집을 안 가게 해주면, 앞으로 짜증을 내지 않을 것이며 어린이집도 매일 잘 다니겠다는 것. 처음에는 바뀐 나이로 여섯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엄마에게 딜이라니, 요놈 봐라 싶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째가 방학이라 오전 돌봄만 하고 일찍 귀가하는 터였다. 나는 속는 셈 치고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때 아이가 불안 증세가 아니라 꾀를 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혹여 불안 증세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나는 그만 아이에게 홀딱 넘어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 쉬었지만 아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매일 짜증을 내고, 매일 따져 묻고, 매일 나를 그야말로 들들 볶았다. 나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급기야 퇴근한 남편에게 안겨 눈물을 터뜨렸다. 너무 힘들어. 조금 울고 나니 진정이 되는 듯했다. 육아 선배의 조언도 구했다. 전략을 달리 하자. 저건 불안 증세가 아니라 꾀병이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정 힘들면 아이를 내보내는 건 학대니, 내가 집을 나가자. 바람 좀 쐬고 오면 나아지겠지.


옥상에서 바람 쐬다 만난 슈퍼문, 안녕! ©️박현안


그 뒤로 아이가 짜증을 내도 나는 더는 회유나 분노, 설득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어, 하고 아이의 마음을 인정한 뒤 그저 내 할 일을 했다. 아이가 정도를 지나칠 때면, 엄마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엄마도 네가 반복해서 짜증을 내면 너무 힘들어,라고 말해주었다. 이후 함께 휴가를 며칠 보내며 조금 잠잠해졌는데, 다시 아침 등원길에 오르자 아이는 또 온갖 떼를 부린다. 아빠나 형에게는 절대 하지 않지만, 엄마인 내게만 보여주는 자신의 밑바닥.


나는 아이의 주양육자이자 감정 쓰레기통인 것이다. 엄마는 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동시에, 꾸밈없는 모습을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그게 나라서 다행이고, 그게 엄마라는 걸 벌써 아는 네가 부럽기도 하다. 수십 년 해오던 친정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속에서 나온 아이가 내게 그 역할을 해달라 조른다. 인생이 참 산 너머 산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 가족일수록 더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모두가 행복한 집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 자신과도 거리를 둘 수 있어야 건강한 마음으로 살 수 있더라는 것.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절절히 깨달은 걸,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게 가르친다고 아이가 체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엄마의 관심이 버거워지는 청소년쯤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까.


엄마도 사람이라는 것,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어도 반복되는 짜증을 부리면 엄마가 많이 힘들다는 것, 엄마도 엄마 역할을 하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는 것. 이 사실이라도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주지시켜야겠다고 다짐한다. 정도가 지나칠 때면 잠시 아이와 떨어져 있겠다는 결심도. 불안 증세와 꾀병도 잘 구분해 보겠다고.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 참 멀고도 멀다.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 게 맞을까. 잘 키운다는 건 대체 뭘까. 내 안에 단단히 세워두었던 정의들이 모조리 무너지는 요즘이다. 아무래도 내가 더 커야 하나 보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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