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힘을 믿습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집안 곳곳엔 늘 장난감과 책이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언젠가는 아주 간소한 것들만 들인 채 살고 싶다. 언제든 떠나는 삶을 살고 싶은 나는 짐이 짐이 되어 떠나지 못하는 미래를 만들고 싶지 않다. 꼭 필요한 것들로만 공간을 채우며 살아가고 싶다. 보여주기 위한 살림살이나 내 과욕에 의한 소품은 들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담백한 삶과 공간을 원한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물욕이 없었다. 사고 싶은 게, 굳이 사서 집안에 두고 싶은 물건이 거의 없었다.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지갑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다이어리를 샀다. 물욕이 거의 없는 나도 가끔 물욕에 시달릴 때가 있는데, 연말연초 다이어리를 볼 때가 그렇다. 초반에 좀 쓰다가 멈추게 될까봐, 결국 집안에 쌓여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될까봐, 다이어리에 혹하면서도 실제 구매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던 내가 정말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샀다. 이 다이어리를 선택한 건 딱 하나, 기간 때문이었다. 내가 산 다이어리는 십 년짜리다. 2022년에 시작해 2031년에 끝나는, 십 년의 기록을 할 수 있는 5cm 두께의 일기장이다.
십 년의 기록을 한 권에 할 수 있다면, 난 앞으로 몇 권의 다이어리를 더 쓰게 될까. 앞으로 주어진 수명을 다 산다면 아마 서너 권쯤 될 것이다. 아무리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더라도, 이 정도쯤은 내 공간에 두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하게 되었다. 이 다이어리는 1년 단위로 나뉜 게 아니라, 1일 단위로 나뉘어 있다. 날짜가 적혀 있고, 아래 십 년치 칸이 나뉜 것. 매일 한 장씩 넘겨 일기를 쓰고 난 뒤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일 년치의 일기를 적어 내려 가는 방식이다. 자연스레 지난해의 오늘을, 이 년 전의 오늘을, 돌아보게 되어 있다.
어느덧 마흔 하나다. 엄마의 마흔이 아직 내 기억에 선명한데, 어느덧 내가 그 나이를 넘어서고 있다. 몸이 다 자라고부터는 나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지 않았다. 오늘이 어제 같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더해져 일 년이 되고, 그 먼지 같은 날들이 합쳐져 십 년이 되었음에도 내게 하루는 그저 어제와 같은 하루였다. 그 하루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십 년치를 쌓아보려 한다.
하루하루는 비슷하지만, 십 년이 지난 세월 끝의 하루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십 년 후의 나는 어떤 나일까. 그때의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 십 년 뒤의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무엇은 되지 못했지만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의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남기고 싶다. 그렇게 쌓인 나의 십 년을 이따금 펼쳐보고 싶다. 기록의 힘을 믿으려 한다.
십 년 뒤의 나는 쉰 하나가 된다. 마흔이 되고 내면의 힘이 생겼다며 좋아한 것도 잠시, 마흔 하나가 되자마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이를 먹으며 과거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에 행복했는데, 문득 주름이 잔뜩 새겨진 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흰머리, 자글자글한 주름 등은 그저 시간의 자국일 뿐이라 당당히 말하던 나였지만, 실제로는 진짜 늙어버린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 그걸 깨닫자 혼란이 찾아왔다. 어떻게 하면 의연하게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내 안의 중심을 찾아본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십 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를 다독인다. 괜찮다. 모두에게 시간은 똑같이 흘러간다. 나만 주름이 늘어나는 게 아니다. 모두에게 세월은 흔적을 남긴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슬프지만, 서럽지만 그렇게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는다.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우주선에 탑승한 게 아니라면, 지구에 발을 디디고 서서 살아간다면 노화는 자연의 섭리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십 년의 기록이 나의 주름을, 늙어가는 나를 초라하지 않게 해 줄 것을 믿는다. 늙어가는 게 두려울 때마다 내 역사를 되짚으며 나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기 바란다. 내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희끗한 머리카락을 만들어낸 하루하루가 이 다이어리에 고스란히 담기기를. 언젠가 이 한 권의 다이어리가 내 삶의 당당한 증거가 되어주기를. 그렇게 시작한다. 십 년의 다이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