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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세계를 탈출하라

by 박순우

얼룩소 서비스 종료로 퍼오는 글입니다. 비밀 계정으로 썼던 글. 어쩌다 보니 갑자기 오픈하게 되네...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기겁한 일이 있었다. 지인의 집에는 최신형 정수기가 있다. 그런데 그 옆에 500ml짜리 생수병이 두 박스나 쌓여있었다. 정수기가 있는데도 생수를 사다놓은 이유를 물으니 밖에 나갈 때마다 한 병씩 들고 가기 위함이란다. 여름철이라 날이 덥고 자주 목이 마르니 이렇게 사다놓고 한 병씩 가지고 다니면 참 편리하다는 말을 했다.


지인의 집에는 생수병만 한 가득 있는 게 아니었다. 욕실에 가보니 아직 쓰지 않지만 미리 사둔 샴푸나 바디워시가 선반에 빼곡히 쌓여있었다. 알록달록 현란한 영어들이 쓰여있는, 보기에도 무척 고급져 보이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것들. 마트에 갈 때면 하나쯤 카트에 담아오고 싶을 만큼 예쁜 용기들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모두 쓰레기로 보였다. 플라스틱 쓰레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되므로 마음껏 써도 된다는 생각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된다. 문제는 모두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플라스틱으로는 PE(폴리에틸렌), PP(폴리프로필렌), PS(폴리스티렌), PET(페트:음료수병 등의 제조에 쓰이는 합성수지), PVC(폴리비닐클로라이드) 등 5가지가 있다. 가정에서 주로 배출하는 플라스틱 중 PE, PP, PS, PET는 재질별로 선별 후 재활용이 가능하다. 반면 PVC는 카드, 휴대전화 케이스, 호스, 인조가죽 등에 많이 쓰이는데 대부분 재활용 되지 않는다. OTHER는 두가지 이상 재질이 들어간 복합재질로 역시 재활용은 어렵다. 물론 우리는 이들 모두를 플라스틱으로 분리배출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제품이 재활용되는 건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재활용이 되더라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알록달록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으로 재탄생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재활용을 하게 되면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종류가 섞이면서 녹는 온도가 달라 강도도 약해지고 품질도 떨어지게 된다. 때문에 재활용한 플라스틱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은 화분이나 보도블럭 등 상당히 제한적이다. 최근 들어 폐플라스틱으로 옷이나 가방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지만 아직 그 양이 많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세계적으로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9%에 그친다. 이는 우리가 버리는 대다수의 플라스틱이 그냥 쓰레기가 된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도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플라스틱이 쓰고 버리면 재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플라스틱 칫솔로 양치를 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든 샴푸와 바디워시로 씻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세제로 설거지를 하고 플라스틱으로 된 에어컨으로 땀을 식히고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인 티브이를 본다. 플라스틱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 어떤 집이든 플라스틱으로 된 제품이 최소 백 가지는 있을 것이다. 일주일에 미세 플라스틱도 카드 한 장 분량을 먹는 엄청난 소화력의 인간이 아닌가.


북태평양에는 한반도 수 배 크기의 플라스틱 섬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플라스틱 섬은 크기가 커지고 있다. 이런 쓰레기들은 작고 작은 미세플라스틱으로 분해되어 물고기와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온다. 플라스틱 섬은 점점 커져가지만 이를 완전히 수거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은 어느 나라도 실행하고 있지 않다. 바다로 유입되는 플라스틱을 막기 위한 방안을 논의 중인 몇몇 나라가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바야흐로 플라스틱의 시대다. 플라스틱은 참 다양하게 가공이 가능해 쓰임이 많다. 모양도 색깔도 성질도 제각각으로 변주가 가능한 편리한 플라스틱이지만, 이렇게 좋아하다가는 온 지구가 플라스틱으로 덮일 날이 머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코끼리 상아로 만들던 당구공을 다른 재료로 만들려다 발명하게 된 게 지금의 플라스틱이다. 당시에는 아마 이 플라스틱이 곧 지구를 지배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생대 4기 지층화석은 닭이라는데 이러다가는 플라스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구 역사상 최초로 생물이 아닌 인공물이 지층화석이 된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플라스틱을 줄이는데 가장 좋은 건 쓰지 않는 것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제품은 웬만하면 구입하지 않는 것, 구입을 꼭 해야 한다면 최소 포장으로 돼 있는 상품으로 고르는 것, 쓰고 난 플라스틱은 잘 씻어 말려 분리배출하는 것 등이 우리가 그나마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웬만한 세제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으니 대신 머리, 얼굴, 몸을 모두 씻을 수 있는 비누 하나로 대체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주방세제도 마찬가지다. 리필을 해서 계속 써야하는 제품의 경우 최소포장된 제품을 구입하거나 알맹상점 등을 이용하면 플라스틱 사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정부가 나서서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 대해 법적 제재를 하고, 강력한 재활용 정책을 펴는 것이다. 기업도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데 동참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 자사 제품의 수거와 재활용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개인보다는 정부나 기업의 노력이 훨씬 영향력이 크므로 이 부분에 대한 각성과 추진이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개인이 지닌 무게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은 힘이 작지만 여럿이 모이면 그 파급력은 대단할 수 있다. 당장 나부터 당장 당신부터 플라스틱의 사용을 줄여야 하는 이유다.


플라스틱 세계를 탈출하라. 미세 플라스틱을 반찬처럼 꼬박꼬박 섭취하고 싶지 않다면, 화석연료의 지나친 의존을 벗어나고 싶다면,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플라스틱을 이제는 좀 줄이고 싶다면, 우리는 색안경을 써야 한다. 이 세상을 가득 채운 다채롭고 화려한 플라스틱을 잠재적 쓰레기로 바꿔볼 수 있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아주 조금이라도 플라스틱을 넘어선 세상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오로지 나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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