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2 얼룩소
평범한 가정의 모습
이른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 엄마가 아이를 깨운다.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세수를 한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을 대충 먹고, 깨끗하게 정돈된 옷을 서랍장에서 꺼내 입고 집을 나선다. 학교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엄마가 차려준 간식을 먹은 뒤 엄마 차를 타고 학원으로 향한다. 학원이 모두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가니 대기 중인 엄마 차가 보인다. 아이는 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씻고난 뒤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그날 과제를 한다. 이후 깨끗이 정돈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부산 마리아수녀회
미국인인 알로이시오 신부가 창설한 마리아수녀회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과 빈민 환자들에게 종교적 실천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곳의 '엄마 수녀'들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려운 환경이지만 아이들이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마리아수녀회는 2011년 이곳의 후견인인 우대성 건축가에게 새 숙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 100명이 지낼 수 있는 지금보다 좋은 숙소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건축가는 더 좋은 숙소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유아 때부터 집단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할 때까지 지속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밥을 먹은 뒤 학교에 간다. 돌아와서 단체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저녁을 먹은 뒤 TV를 단체로 보고 잠자리에 든다. 아이들의 똑같은 패턴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엄마 수녀와 자원봉사자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하고 청소와 빨래, 숙소 관리, 장보기 등 수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부족함 없이 키우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헌신이었지만, 건축가는 여기에서 아이들의 무기력감을 발견한다. 아이들은 생각도 결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주어진대로 규칙대로만 하면 되었다. 그렇다보니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도, 원하는대로 방을 꾸밀 수도, 조금 늦게 일어나거나 일찍 일어날 수도 없었다. 건축가는 건물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틀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한다.
기숙사식 건물을 철거한 자리에는 여덟 채의 단독 주택이 들어섰다. 각 주택에는 열 명의 원생들이 입주하고, 매달 주어지는 생활비로 직접 장을 보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게 했다. 엄마 수녀들은 큰 그림의 지도만 하고 아이들의 멘토 역할만 했다.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아이들은 꽤 빨리 바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내 집이라는 소속감은 책임감으로 커져갔다. 가끔 생활비가 부족해 힘들어할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점점 어떻게 나눠쓰고 일상을 유지해 갈지를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점점 삶의 주인이 되어갔다. 심지어 생활비를 아껴 동네 독거노인에게 쌀을 전달하기도 한다.
자립 없는 독립은 없다
다시 맨 처음 언급한 평범한 가정을 돌아본다. 아무도 이 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수녀회 사례를 살펴본 뒤라면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교육을 너무 강조할수록 양육자들은 아이들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 노력한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는 등 모든 집안일은 양육자의 차지가 된다. 아이들은 모든 게 갖춰진 삶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며 자란다.
아이들은 언젠가는 독립한다. 공부가 길어져 시기가 좀 늦어질 수는 있지만 모든 아이는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홀로 지내야 한다. 공부에만 집중해온 아이는 독립은 해도 자립을 하기는 어렵다. 설거지감은 쌓여가고, 빨래는 쾨쾨한 냄새가 나며, 분리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는 방을 뒹군다. 돈을 벌어도 생활비를 어떻게 쪼개 써야 할지 몰라 어떤 달은 라면만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공부만 잘하면 다 되는 세상은 어른들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학벌지상주의, 공부만능주의는 이렇게 아이들이 독립적인 한 인간이 되는 걸 가로막는다. 아이들이 진짜 배워야 하는 건 돈을 계획성 있게 쓰고, 싱싱한 식재료를 사서 다양한 음식을 만들며,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독립은 여건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자립은 다르다. 얼마든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을 어른들이 너무 공부로만 내모는 건 아닐까.
마리아수녀회의 각 집 마당에는 감, 석류, 포도, 매실 등 다양한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다. 아이들은 이곳 나무들에서 수확한 열매를 나의 열매로 기억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이곳의 이름은 수국마을이다. 나무 수(樹)와 나라 국(國)을 써, '나무가 자라는 나라'가 되었다.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커가는 아이들은 이렇게 나무와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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