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푸른 기억

네팔 포카라와 사랑곳의 기억

by 박순우

긴 여행을 다녀온 지 십 년이 넘게 흘렀다. 어떤 기억은 어제 일어난 일처럼 명확한 데 반해, 어떤 기억은 아무리 머릿속을 파헤쳐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중 하나가 네팔 포카라와 관련된 일부 기억이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갔는지, 룸비니를 들렸다 포카라로 갔는지,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봐도 명확하지가 않다.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부랴부랴 룸비니의 기억을 글로 쓰고, 한동안 포카라에 대해 떠올려 봤지만 여전히 기억을 되찾지는 못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건 포카라로 향하던 길 중간에 아찔한 절벽이 굽이굽이 펼쳐지는 험한 산들을 넘었다는 것. 버스는 그런 길을 수 시간동안 달리고 달려 드디어 나를 포카라에 내려주었다.


포카라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청량함처럼 그 도시의 첫 인상은 그저 아름다웠다. 병풍처럼 늘어선 만년설 덮인 안나푸르나, 도시 중심에 자리잡은 고요하고 평온한 페와호수, 집집마다 나무를 휘어 만든 그네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트레킹하는 사람들을 위한 적당한 상권까지. 복잡하고 북적대는 카트만두와는 확연히 다른 여유와 낭만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한 달 동안의 중국 여행과 카트만두를 거친 내게는 쉼이 절실했다. 아무리 여행이라지만, 매일매일 새롭게 달릴 수는 없는 법. 짐을 싸고 풀고 또 싸는 일이 좀 지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포카라의 여유가 퍽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 곳에 오래 머물기로 작정했다. 별 것 안 하고 어슬렁대기. 책 읽기. 멍 때리기. 이 세 가지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느즈막이 일어나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대며 구경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이드북과 흥미로운 책을 정독하고, 한번씩 고개를 들어 이름도 푸르른 안나푸르나를 마냥 바라보는 일상. 때론 현지인처럼, 때론 여행객처럼, 그렇게 포카라의 삶이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간을 따라 몸이 원하는대로 흐느적흐느적 느리게느리게. 존재만으로도 경이롭게 느껴지는 히말라야 산맥과 호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포카라는 충만했다. 그곳에서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못 행복했다.


섬에 겨울이 찾아오면 한라산에는 눈이 쌓인다. 겨우내 하얗게 눈으로 덮인 백록담을 섬 어디서든 볼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포카라의 안나푸르나를 떠올린다. 얼마나 오래 쌓여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그 단단하고 든든한 설산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리고 주문을 건다. 저건 한라산이자 안나푸르나야. 그러면 내가 선 곳은 일상의 섬에서 네팔 포카라로 마법처럼 변한다.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내게는 삶의 터전인 이곳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이렇게 때때로 마법의 주문을 걸기 때문.


히말라야를 넘어다니는 철새 이야기를 책에서 본 적이 있다. 히말라야가 8km 넘게 치솟기 전부터 그 길을 오갔던 새인지라, 아무리 높아지고 기상 상황이 좋지 않다 해도 길을 우회하지 않고 그 길을 아직도 오가는 전설적인 철새들의 이야기. 살인적인 추위와 희박한 산소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또 한 계절을 나기 위해 힘찬 날개짓을 하는 새들을 이따금 떠올린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건 새들에게도, 인간에게도 녹록지 않은 일이구나.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음에도 결국 오가던 길을 선택하고 마는 존재들을 오래오래 생각한다.


바쁘게 이곳 저곳을 다녔던 곳보다 천천히 쉬어갔던 곳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남들은 그저 하루나 이틀쯤 머무르는 곳을 나 혼자 일주일씩 어슬렁 댔던 곳이 더 여행다운 기억으로 각인된다. 꼭 가봐야 한다는 곳을 빼먹지 않고 부지런히 다닌 곳보다 꼭 가야하는 곳은 없다는 듯 몸이 이끄는대로 다녔던 곳이 내게는 진짜 여행의 기억으로 박힌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그곳을 전부 안다 말할 수는 없다. 같은 장소라 해도 그날의 온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그때 그곳의 내가 다르므로. 우리가 같은 곳을 가도 결코 당신과 내가 같은 곳을 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포카라에는 사랑곳이라는 한국어 지명 같은 봉우리가 있다. 히말라야가 가장 잘 보인다고 소문난 곳. 포카라에서 쉬어가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곳을 오르기 시작한다. 10kg짜리 배낭을 메고 온몸이 흠뻑 젖도록 씩씩 대며 비탈길을 오르고 올랐다. 다들 잠깐 머무는 그 곳에서 나는 또 며칠을 쉬어갔다. 세계 3대 패러글라이딩 명소로 불리는 곳인데, 나는 그 언덕에 철퍼덕 자리를 잡고 앉아 분주히 날개를 펼치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히말라야를 등지고, 페와호수를 앞에 두고, 날아오르는 사람들. 출처 - unsplash


해발 1592m의 땅인 만큼 사랑곳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이 껴있을 때가 잦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힌 어느 이른 아침, 서둘러 전망대에 올랐다. 층운형 구름이 낮게 깔린 히말라야 산맥 위로 장렬히 떠오르던 태양. 지구에서 손꼽히는 경이로운 일출을 눈에 담는 행운을 내가 잡을 수 있었던 건, 단지 남들보다 오래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마치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들처럼, 그저 그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덤덤히 태양을 맞이했다. 마치 내일은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종교와 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