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코치 Aug 13. 2022

예견된 슬픔과 갑작스러운 슬픔의 차이

감정 & 관계

예견된 슬픔에는 자유가 있다.

마음껏 슬퍼하고 눈물 흐릴 수 있는 자유.

이런 감정이 드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용인된 슬픔이다.



내가 대학생 때, 할머니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1년을 고생하시다가 우리 집 거실에서 돌아가시던 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직감적으로 그날이 그날(?)이 될 것이라고 느꼈기에 모두 모여있었다.

우리 가족과 고모, 작은아버지네 가족까지 모두 모여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슬퍼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고, 할 수 없는 분명한 슬픔의 기억이다.

하지만 슬픈 영화인 줄 알고 보는 것처럼 예견된 슬픔이었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었다.

그날의 눈물은 솔직히 따뜻했다.

예정된 시간이 있어, 부지런히 추억을 쌓을 수도 있었고, 용기 내어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었다.

바쁜 부모님 대신 휴학을 하고 할머니를 돌봐드리며 할머니와 온전히 시간을 함께 할 수도 있었다.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그럴만한 분이시니까.


장례식장에 와준 분들을 통해 '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는 말을 여실히 느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만으로도 할머니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고,

슬픔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예견하지 못한 슬픔은 슬픔을 넘어 공포가 된다.

끊임없이 상황을 곱씹고, 스스로 자책하고, 후회하고, 때론 원망한다.

슬픔을 감당하는 것 말고도 머릿속에 수없이 할 일이 많다.

우선순위가 없이 뒤죽박죽인 상태로 상당히 오랜 시간을 허우적 대거나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갑작스러운 이별을 했을 때 그렇다.

머리로 흘러들어 가는 피가 부족한 듯 쥐가 나고, 숨 쉬는 공기가 맵고, 목에서는 비릿한 피맛이 나는 것 같고, 시력을 잃은 듯 시야가 흐리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을 받는다.

몸은 꼼짝없이 가만히 있는데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저 밑에 지하세계로 한 없이 꺼져가는 느낌이다.

그날의 눈물은 신맛도 나고, 짠맛도 나고 매운맛도 났던 것 같다.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갑작스럽게 잃는다면 어떨까?

이번 극심한 폭우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분들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슬픔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유가족들의 마음을 어떤 것도 감히 위로해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두 번째 유산이 확정되었을 때, 딸아이 어린이집 친구 엄마가 해준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저도 유산해봐서 알 것 같아요. 그땐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되더라고요. 위로해 줄 말이 없어 죄송해요. "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비슷한 상황이 오면 종종 써먹는다.

내 마음이 상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그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니까.

온 마음을 뒤져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조급하지 않아도, 그에 준하는 나의 실패사례를 찾지 않아도 되는 말.


" 감히 위로해 드릴 말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불편한 대화를 잘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