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저
책을 읽기 전 출판사 서평을 먼저 훑어보는 습관이 있다. 지적인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면 당장이라도 읽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다. 수년간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어 온 이 소설에 대한 소개는 오히려 담담하고도 담백했다. 고독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의 사랑과 인생이야기, '극적'이거나 '파괴적'이라는 둥의 표현이 없어서 좋았다. 에너지가 어디서 새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기운없이 늘어져 있는 요즘이라,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는다면 그대로 며칠 앓아 누울 것 같았다. 고독한 도시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이 현대 사회에만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 먼 과거에도 길을 잃은 청년들은 늘상 존재했다는 걸 알고 나니 시작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이야기에 몰입하여 마치 와타나베가 된 것 마냥 대화에 참여했다. 와타나베가 겪는 상황들 속에서 같이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나였으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며 쉼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느낀 점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와타나베는 나보다 훨씬 과감하고 방황함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어른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재깍재깍 회사에 다니는 건 난데, 술에 찌들어 밤거리를 헤매며 무턱대고 기차를 타고 떠나는 와타나베가 더 성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람을 상대하는 태도에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자고 스치듯 만난 인연들에 대해 와타나베가 취한 행동들이 과연 책임감을 따져 물을 수 있는가 하면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지켜주고 사랑하고자 했던 오랜 친구 나오코와 그녀의 병원 동료인 레이코상, 미도리에게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의 책임감에 대해 감히 인정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오코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다시 편지를 받았을 때, 무작정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나오코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줬다. 이 상황 속에서 나였다면, 선뜻 외딴 지역으로 찾아가 사정을 들어주고 이해해줄 수 있었을까. 제 아무리 친한 친구이거나 연인이라고 해도 그동안 연락을 주지 않았다는 서운함이 심장을 뚫고 나와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애썼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우선 나오코를 진정시키고 보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오코의 몸이 좋지 않을 때에도 기다리며 먼저 연락을 줄 때까지 재촉하지 않는다. 속은 답답했겠지만 무턱대고 찾아가진 않았으니.
레이코상에게도 마찬가지로 한결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나오코와 보낼 수 있는 시간 속에서도 레이코상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에서 사람을 대할 때 진중한 모습이 엿보인다. 레이코상이 밤산책을 하며 본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털어놓았을 때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조금의 선입견이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 시간은 모두에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내가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였으면 나오코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산책도 종종걸음으로 했을 것 같고, 이미 정신병원에서의 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이기에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얄팍한 프레임을 씌우고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내색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내 심사가 요즘 꽤나 뒤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인 미도리는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다소 자극적인 말로 상대를 당황시키기도 하고 가족을 챙기는 태도에서 진중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천방지축이지만 해야 할 건 다 하고 있는, 와타나베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미도리가 갑작스럽게 와타나베의 삶에 침입했을 때 밀어내지 않고 삶의 한 켠을 내어주는 모습에서 내 그릇보다 큰 와타나베의 그릇에 한번 더 감탄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때때로 과한 요구를 하는 미도리에게 격하게 반응하지 않고 잔잔하게 그녀를 감싸준다. 무조건 순응하지 않고 본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솔직함이 무례함이 될 수 있는데도 와타나베에겐 매력의 요소가 된다. 와타나베가 드러내는 본성 속에 악함이 없다는 것을 내가 느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꿰뚫어 보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장편소설을 쉬지 않고 읽었다. 주변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와중에 와타나베가 느낀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졌고,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책임감있게 관계를 대한다는 게 무엇인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번쯤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