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301] 모종의 도무지(2)

by 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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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25도를 웃돌면 여름으로 본다는 말을 아침 라디오로 들으며 출근한 어느 날. 좀 덥지만, 김치찜 어때, 이모의 제안에 오랜만에 입맛이 돈 나는 선뜻 동의했다. 음식 냄새 때문에 평소에는 점심 후보에 오르지 못하던 메뉴였다.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출입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며 이모와 차가운 물에 우려낸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열린 출입구 밖에서 안으로 들어서길 망설이며 서성이는 걸 본 건.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이모와 내가 거의 동시에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살짝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로 주춤, 몇 초쯤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걸음을 떼 이모 앞에 섰다. 나는 그 잠깐 사이에도 내가 방금 뱉은 어떻게 오셨냐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말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어떻게 오셨어요,라니. 사람들이 두루 쓰는 말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담아두었다가 비슷하게 흉내 내듯 내어놓을 때마다 멈칫하게 되는 때가 있다. 별말씀을요. 덕분입니다. 같은 말들. 오후의 첫 손님인 그는 분명 목적이 있어 이모의 안경점을 찾은 것일 텐데 나만큼이나 다른 생각에 젖어있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이모가 한 번 더 묻고 나서야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경을 새로 맞추려고요.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통해 나는 그가 아침마다 마주쳤던 갈색 푸들의 보호자임을 알아챘다. 강아지와 함께가 아니어서였는지, 그의 차림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복장만 다를 뿐인데 너무 낯설어 보이는, 노년에 접어든 한 남성.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의 목소리건만, 나는 어떻게 목소리로 그를 알아챈 것일까. 어쩌면 이후 도원이 짚어준 대로 그가 말을 시작하였을 때 그를 더 자세히 바라보았을 것이므로, 그 덕분에 얼굴을 알아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럼 지금 쓰고 계신 안경 좀 볼 수 있을까요. 안경 살펴보고 금방 시력 검사 해드릴게요.


이모의 말에 그는 다소 느리다 싶은 움직임으로 안경을 벗고는 손가락 끝으로 안경다리를 살짝 집은 채로 안경을 건넸다. 아유, 렌즈가 많이 상했네요, 생활하시기 많이 불편하셨을 것 같은데…. 말주변이 없는 편인 이모는 웬일인지 이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조금은 수선스럽게 그를 검사 기기 자리로 안내했다. 이모의 말대로 그의 안경은 언뜻 보기에도 렌즈가 많이 상해서 그 구실을 제대로 해내기 힘들어 보였다. 그건 부주의한 사람이 짧은 시기에 낸 생채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켜켜이. 아주 오래, 그저 먼지처럼 사물에 쌓인 어떤 시간의 흔적이었다.


일련의 시력 검사가 끝나고 이모는 그의 시력이 꽤 나빠 렌즈가 바로 완성되기는 어렵겠다는 설명과 함께, 제작이 일주일쯤 걸릴 텐데 괜찮겠느냐 물었다. 그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일을 해치우고 싶다는 듯 조바심 나는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산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행동에 마치 정해진 정도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경테를 고르고 값을 치르는 내도록 그는 공손했다. 어떤 단어는 상대가 필요하다. 공손이 바로 그런 단어일 것인데, 그는 세상에 오직 자신 혼자 있을 때에도 공손할 것 같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도 자신의 움직임에 스스로 깜짝 놀라는 눈치였고 조금쯤은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몹시 지친 노인 같아 보이면서도 낯섦 앞에 당황하는 아이 같은 모습. 최대한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자꾸만 그에게 시선을 두는 사이 완성이 되면 연락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이모가 김*교 씨에게 안내지를 건넸다. 양 손가락 끝으로 멀찍이서 그것을 받아 든 그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그런데 있잖아, 그 사람, 그런데도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어.

조심스러운 사람은 비굴한 사람일까.

그건 아니지만, 비굴한 기색으로 비굴하지 않았어.

재미있네. 비굴한 기색으로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나 이제 그분 이름 알아.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말야, 사람들 이름은 다 저마다 고유한 건데 정말 아무렇지 않게들 서로에게 알려주잖아. 그냥 가리키려고 부르는 것이기도 한데, 또 고유하고, 무척 사적인 것이면서도 두루 불리는 거.

우리한테는 타인이 우리의 이름을 부를 때 그걸 받아들이는 수용체랄까, 안테나가 두 개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책상이나 신발과 같은 느낌으로 기능하는 박지우와 ‘너의’ 박지우를 각기 다른 매개체로 수용해.

박지우와 박지우네.

응 박지우와 박지우. 그리고 지금 네 말 이해했어.

어떻게 이해했어?

그분 이름은 안 알려줄 거야.

싱겁긴. 근데 그게 좋겠다.


그날 나는 잠들기 전 다음의 단어들을 썼다.


비굴(卑屈)

비겁(卑怯)

비열(卑劣/鄙劣)


비열하다의 경우 다른 한자를 쓰기도 하지만 모두 낮을 비(卑)를 쓴다. 어근들이 모여 단어가 되지. 자세를 낮추는 것만으로는 비굴해지지도 비겁해지지도 않는다. 비열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같은 자세로 비열하기까지 한 것. 서로 다른 단어인데 마치 시간이나 감정의 정도라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인 단어들처럼 느껴졌다. 비굴이 비열이 되어서는 안 돼. 거기에까지 도달하는 건 너무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한가. 너무한 감정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마음대로 말할 수도 없어. 이런 끝도 없을 막연한 생각 속을 헤매다 보니 숨이 찬 것도 같았다. 어찌 되었든 김*교 씨는 한결같이 자신을 낮췄다. 그를 표현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지만.




김*교 씨의 안경 완성일이 되었다. 완성 안내 문자를 받은 김*교 씨는 반팔 셔츠에 **물산이라는 상호명이 적힌 조끼를 입고 다시 이모의 안경점을 찾았다. 곧 강아지와 점심 산책을 가려는 걸까. 안경을 건네받고 그것을 천천히 쓰는 김*교 씨. 이모의 설명 또한 아주 유심히 듣는 눈치였다. 의외였다. 전에 쓰던 안경을 봐서는 그저, 안경을 쓰며 살아왔으니 안경을 쓴다, 뭐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제 다 되셨다는 이모의 말에 나는 준비해 둔 안경집을 그에게 건넸다. 지난번 내가 안경값 안내와 결제를 맡았기 때문인지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계산…. 얼마 더 하면 될까요.

아뇨, 저번에 전부 결제하셨어요. 며칠 써보시고 불편하시면 꼭 찾아 주세요.

네…. 그럼.

아, 저, 강아지 키우시죠?

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김*교 씨는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답지 않게 왜 알은체를 했을까. 그동안 당신을 보고 있었다는 고백을 왜?


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놀란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그는 안경을 한번 고쳐 쓴 뒤 예의 깍듯한 인사를 남기고는 안경점을 나섰다. 나는 남은 내 몫의 감정들, 무안함이랄지 부끄러움 혹은 후회 같은 말하기 참 간단한 감정들이 마음에 내려앉는 걸 망연히 느낀 채 서 있었다.


저분 어디서 본 적 있어?


김*교 씨가 나간 뒤 이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물어본 덕분에 나도 덩달아 아무렇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듯 웃으며 답했다.


아냐, 이모. 내가 잘못 봤나 봐.


어떤 사정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았고 보았다고 생각하고, 도원의 말대로 정을 쌓았다고 할 수 있는 그간의 시간들은 김*교 씨에게 공포로까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내 쪽에서는 전혀 타인일 뿐인 사람이 갑작스레 아는 체를 한다면 불쾌할 터였다.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아는 것들이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은 왜 두 번이나 반복될까. 언어는 자의적이라고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반박하고 싶어지는 말들이 있다. 그렇게 태어나야만 했던 말들이 있다고. 떠오르는 대로 반복되는 첩어들을 종이에 눌러쓰며 그날 밤을 보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다음 부끄러움을 위한 감정이라고, 이제까지는 스스로 위로하듯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지금 부끄러우면 다음엔 조금 덜 부끄러울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부끄러움이란 도움이 되는 감정 아닐까. 감정에도 꾸준히 긍정과 부정을 생각하며, 나 이렇게 고단하게 살고 있다.


너무 당황하니까, 같이 당황하게 되더라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네가 전공자니까 묻는 거다만, 그, 오장육부와 관련된 관용적 표현들 말야. 그거 가끔 생각해 보면 재미가 있어. 아 물론 지금 네 감정을 내가 가벼이 보는 건 아니고. 심장이 떨어지는 거 같다고 하는 건 정말 그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잖아. 근데 우리는 심장이 떨어져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걸 짐작하고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말하는 걸까. 우리는 정말정말 서로에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자신을 말야.

나 지금 나를 정말정말 표현하고 싶어하는 거였을까?

응. 그냥 우리는 다들 그런 존재들이고 그걸 성공해 낸 사람과 번번이 미숙한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

번번이. 또 첩어다.

응?

아니, 두 번씩 반복되는 말 말야. 나 그날 그분께 실수하고 지긋지긋하다고 느꼈거든. 근데 그렇게 두 번씩 반복되는 말들. 오늘 번번이를 들어 봐도 그렇고. 참 귀엽다. 그것도 표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잘 담긴 단어니까.

말이 참 귀여워. 지금까지 인류가 애써 온 그 흔적들, 도서관에 넘쳐 나잖아.

응 귀엽네.

응, 너도 귀여워.

응, 너야말로.




김*교 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안경점에 다녀간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부터 아침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퇴근길에도 종종 그와 그의 갈색 푸들이 저만치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오후 산책도 아예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경점을 열지 않는 월요일에 이사라도 나간 걸까. 하긴 이사는 꼭 월요일이 아니었대도, 내가 그의 집 앞을 종일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 갔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사를 간 것이 아니라면? 김*교 씨는 오직 강아지랑 둘만 살고 있다고 내 멋대로 단정지었으므로, 그의 신변에 어떤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그의 이름도 알고 그가 사는 빌라도 알고 그의 핸드폰 번호도 안경점 고객 정보에 저장되어 있지만 김*교 씨가 일주일을 동네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실종되었다고 신고할 수도,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난 둘 다 하고 싶었다. 안경점 앞 지구대로 달려가 매일같이 갈색 푸들과 함께 산책을 하던 김*교 씨를 아무도 모르냐고. 그가 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아침에도 점심에도 보이지 않는다고. 이사를 간 건지 실종이 된 것은 아닌지 왜 이곳의 아무도 그를 신경쓰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고객 연락처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어 발신음이 가는지 확인한다든지, 혹시 전화기가 꺼져 있다거나 없는 번호라거나 하는 안내음을 듣고 망열자실하기랄지, 차라리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할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그런 상상을 현실로 끌고 올 용기는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스토커가 맞았다. 완벽한 스토커이다. 이 관심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엉터리 감정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월요일, 안경점 휴무일.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멍하니 누워 있다가 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신경이 쓰여.

걱정이 되는 거야, 아님 단지 궁금한 거야?

모르겠어. 그냥 궁금한 거라 하기엔 어딘지 자꾸 마음이 쓰여. 좀 불안한 것 같아.

그분이 그 불안에 분명하게 들어서 있어?

불안 안에 있어.


도원은 그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같이 산책하자고 했다. 만나자.라고 말하지 않고, 산책하자.라고. 어디로 갈까, 묻는 내게 학교에 가자고 했다. 함께 학교를 간 건 오랜만이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어 걷기에 꽤 괜찮았다. 나는 천천히 도원의 팔에 팔짱을 꼈다.


나, 이렇게 팔짱 끼고 걷는 거 좋아해. 실은 중학교 때 걷는 게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어. 말 그대로 걷는 게, 걸음걸이가 너무 힘들었어. 나는 똑바로 걷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 거야. 아침에 등교할 땐 친구들과 같이 가지 않고 혼자 갔는데 학교가 여럿 붙어 있어서인지 등굣길이 항상 너무 붐볐어. 항상 너무 학생들이 많았어. 그렇다고 아이들이 많은 걸 탓할 수도 없지. 나도 그중 하나였고, 우리는 다 학교에 가야 했고, 뭐 그런 거니까.

수많은 아이들이 똑바로 잘만 걷는데 심지어 똑바로 달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게 안 됐어. 자꾸만 옆으로 옆으로 누가 미는 것만 같았어. 오른쪽으로 치이면 왼쪽으로 간신히 간신히 그렇게 걷다 보면 종아리가 너무 뻣뻣하고 아파왔어. 그럴 때, 그렇게 걸을 때 생각을 했어. 엄마가 같이 걸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걷고 싶다는 생각보다 엄마랑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걷는다면 좋겠다. 내가 앞으로 어딜 가든 어딜 향해 걸어가든 엄마와 걷는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그런데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바람인 건 잘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러기에 나는 너무 큰 세상에 태어나 버린 거야. 어쩌자고 엄마는 날 낳았을까.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그런 생각을 하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잠드는 날도 있었어. 그냥 그랬어. 너에게 처음 말해봐.


학교를 한 바퀴 돌고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종각엘 갔다. 종각에서 광화문으로 광화문에서 명동까지 걸었다. 해가 차츰 기울었다. 배고프지 않아? 배고파. 좋다. 배고픈 건 좋은 거야. 좋은 거야? 응, 좋은 거지. 좋다를 몇 번을 반복하며 충무김밥집엘 들어갔다. 도원의 중학교 앞엔 충무김밥집이 있었다고 했다. 충무김밥집엔 손님이 항상 없었고, 손님이 너무 없으니 도원과 친구들은 왜인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걱정되는 마음이었다고. 충무김밥집 사장님의 생계를 걱정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생계를 걱정했을 어린 도원을 상상하니 너무 귀여웠다. 귀엽다, 도원아. 도원이 웃었다. 그런데 있잖아. 그 가게가 있던 건물, 사장님 아내분 건물이었대. 사장님은 충무김밥보다 주식에 더 관심이 많아서 가게에 앉아서도 주식만 봤대. 우리 엄마가 어느 날 거기서 충무김밥 사면서 알게 됐다나 봐. 우리 걱정들 말야, 쓸데없는 거 하나도 없어. 걱정해도 되지. 걱정의 대상이 실은 아주 괜찮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고 말야. 도원의 말을 들으며 젓가락으로 빤빤한 김을 두른 김밥 하나를 조심히 집어 들었다. 창밖은 이제 밤이었다.




김*교씨의 소식을 여전히 알지 못한 채 일주일이 또 흘렀다. 아침에 양치를 하는데 잇몸에서 피가 났다. 입안이 좀 헌 것도 같고, 몇 해 전 때운 곳도 영 시원치 않게 느껴졌다. 치과에 가긴 귀찮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하고 아픈 곳을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거실에서 책을 보는 엄마에게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운동화를 천천히 신었다. 지난주, 모처럼 많이 걸어서인지 종아리가 아직도 조금 당겼다.


오랜만에 들른 치과.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곳이다. 어릴 때에도 이미 할아버지처럼 보이던 원장님은 물론 직원분들 모두,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올 때마다 이곳은 시간이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지우 학생,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어요?

우린 다 잘 지내지. 어디 불편해서 왔어? 병원은 올 일이 없는 게 최곤데.


싱긋, 웃으며 인사해 주는 선생님과 반갑게 몇 마디 나누고 대기실 자리에 앉았다. 병원이 크지 않은 탓에 진료실 소리가 밖으로 울렸는데 낮고도 낯선 외국어, 그리고 어떤 아주머니의 커다란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아주머니의 말투는 어딘지 싸우는 투로 들려서 조금 긴장이 됐다. 무슨 일일까. 몇 분쯤 지나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대기실로 나왔다. 목소리로 느꼈던 인상보다는 꽤 나이가 든 할머니 한 분과, 젊은 외국 여성, 뒤이어 난처한 표정으로 따라 나온 조무사 선생님.


이게 그래도 뽑아야 할 상황이라서, 설명은 드려야 하거든요.

아니 무슨 설명을 해. 나 얘랑 말도 잘 안 통한다구. 자기도 아파서 온 건데, 치료받는 거 다 아는데 그냥 뽑아줘.

환자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뽑기에는 무리예요. 게다가 사랑니잖아요.

아이 참, 이거 뭐 말이 안 통하는데 뭐 그럼 어떻게 해.


저기요.


세 음절의 음성을 뱉고서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일어서서 외국 여자의 팔을 잡고 있단 걸 깨달았다.


할머니. 할머니는 할머니 이를 누가 막 다짜고짜 눕혀서 뽑으면 좋겠어요? 할머니 사랑니 뽑아 봤어요? 그게 얼마나 아픈 줄 아세요? 우리말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누구 때문에, 무슨 사정으로 우리나라까지 온 건데요. 이분 여기 와서 한국어는 배우고 있는 거예요? 한국어 수업 데려다주는 거예요? 할머니는 이분 나라말 왜 공부 안 하는데요? 아니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화가 너무 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무턱대고 화내도 되는지, 숨은 왜 이렇게 차고 몸은 왜 이렇게 추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을 떨면서 핸드폰을 켜 번역앱을 켰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으니 조무사 선생님이 옆에서 대답을 해줬다. 나는 우리말로, 사랑니를 뺄 건데 괜찮겠냐고 어플에 입력했다. 순식간에 내 말이 그 여자의 언어로 바뀌었다. 내가 뱉은 말 중 무엇도 이해 못 했을, 타국에서 온 그는 조금 주춤거리며, 액정에 쓰인 자기 나라의 문자를 읽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소란스럽던 상황이 정리됐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몸이 너무 추운 나머지 이까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접수실 선생님께 인사도 못하고 허둥지둥 병원 밖으로 나가려는데 할머니가 나를 붙들었다.


저기! 내가 몰라서 그래. 몰라서 그랬어. 아까 그거 어떻게 쓰는 거야? 내 핸드폰으로도 할 수 있어? 학생이 좀 알려줘….




그날 그렇게 병원 문 앞에서 애처럼 울어버리고 다시 치과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우 학생, 오늘은 치료 정말 못 받겠어? 내일 와. 응? 내일은 꼭 와. 접수 선생님은 내 볼에 붙은 휴지를 떼주며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정말 다시는,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긴 여름을 지나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모는 나와 일하는 게 너무 좋지만 마냥 붙들 수 없으니 진짜로 조만간 사람을 뽑을 거라고 했다. 나는, 내년까지는 이모랑 있고 싶다고 했다. 모든 게 멈추는 겨울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고 엄마랑 마주 앉아 오랜만에 수제비를 먹는데, 엄마가 말했다. 지우야, 치과 안 가도 돼? 너 저번에 치과 가서 기다리다가 치료 못 받고 갔다며. 엄마 오늘 충치 치료 갔더니 선생님이 그러더라. 근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는데, 지우에게 전해주래. 그날 지우가 본 외국인 환자, 한국어가 조금 늘었다고. 며칠 전에는 혼자 치료 받으러 왔는데 우리말로 인사도 하고 얼굴도 밝아졌다고. 무슨 일이야?


수제비 국물을 마시는데 콧물이 자꾸 났다. 뜨거운 음식 먹을 때마다 이게 힘들다니까. 엄마, 비염쟁이는 슬프다. 치과 내일 퇴근하고 갈게. 저번에 갔을 때 우리말 하나도 못 하는 외국인 봤었거든. 마음이 안 좋았는데 공부하고 있나 보네. 다행이다. 엄마, 나 선생님 안 할래. 조금 더 이모 일 돕다가 하고 싶은 거 생기면 말해줄게.하고 훌쩍거리며 주절거리니 엄마가 웃으며 알겠으니까 코 좀 풀라고 한다. 나도 엄마를 따라 웃는다. 오랜만에 웃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단지, 웃는 걸 알아챈 게 오랜만인 걸까. 도무지의 시간을, 이제 막 지나친 기분이다.








'도무지'를 종종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목요일 연재글인 '딴-생각'에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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