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 미약
뉴스에 나오는 온갖 흉흉한 사건들을 보며 엄마는, 저래 놓고 심신 미약 주장하겠지. 나야말로 심신 미약자다. 라고 말씀하셔. 나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조심해라, 나 심신 미약자다. 이러면서 으름장을 놓지. 우리는 마주 보고 온 얼굴로 웃지만 웃음 끝은 항상 쓰다.
얼마 전 네가 엄마랑 춤출 거냐 물었던 날, 그날은 엄마와 내가 서로 감정이 상했던 날이었어. 나는 왜 이럴까. 말 그대로 심신 미약 상태인 엄마에게 온 힘으로 화를 내 버리다니. 이렇게나 막돼먹어도 되는 걸까. 엄마의 병을 알기 전까지는 언젠가는 후회할지 모른다며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바로 그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데. 이 분명하고 뚜렷한 후회 안에서도 여전히 튀어 나오는 못난 말들이, 숨길 수 없는 짜증의 표정들이 스스로 참 당혹스러워.
마음이 힘들어서 그 주에는 일이 끝나도 집에 바로 가지 않고 서점을 가거나 절에 들렀다 들어가거나 그랬어. 서점에 간 날은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을 사서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제법 큰 빵집인데 손님은 거의 없고 웬 여자가 혼자 4인용 자리에 앉아 빵으로 대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어. 양손으로 커다란 빵을 뜯고 입 안에 욱여넣고 있더라고. 카페에서 혼자 빵을 엄청나게 먹는 여자가 다 있네.라고 나는 생각했어. 그 여자도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꼴랑 커피에 휘낭시에 하나 먹으면서, 책은 올려만 놓고 읽질 않는 여자가 다 있네. 그런 한 문장짜리 생각이라도 말이야.
어제는 정신 건강과를 찾은 두 번째 날이었어. 어떻게든, 약을 먹어서라도 불안과 화를 눌러야 한다고 마음먹었거든. 아주 오래 이어질 오늘들이 버거웠던 것 같아. 지난주 수요일, 병원에 처음 간 날 진료실에 앉자마자 내가 여길 뭐하러 왔나, 후회를 하긴 했어. 선생님이 물어봤거든. 요즘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말이 잘 나오질 않았어. 가장 뚜렷한 문제, 엄마의 건강 상태를 이야기했어. 그 뒤에 나올 질문들이 무서웠어.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셔도 이제 막 마주 앉은 당신에게 제가 무슨 말이든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 곤란하네요. 자꾸 시계를 보시는 건 진료 시간이 끝나가기 때문인 건가요. 선생님, 저는 알고 겪는 고통은 별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차피 사람은 다 죽을 거란 걸 알아요. 노년은 질병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에 던져질 줄은 몰랐어요. 어쩜 한 군데에서도 희망적인 말을 해주지를 않아요. 관리하면 된다.와 관리하면 나을 거란 말은 하늘과 땅 차이죠. 저는요, 그냥 한마디라도 응원을 듣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병원에서, 의사들끼리, 약속이 되어 있는 걸까요. 뭐 이런 두서없는 말들이 마구 튀어 올랐지만 무엇도 목소리가 되진 못했어. 선생님은 일주일 치 약을 지어 주며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노력을 하든 초라할 거라고. 약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더라.
별 거지 같은 말을 다 듣네.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 말은 큰 위안이 되었어. 어차피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야. 내 힘으로 끝낼 수 없는 일이야. 그런 생각을 하게 한 말이었어. 초라할 거예요. 그 한마디를 계속 속으로 읊으면서 한 주를 보내고 어제 다시 선생님을 만난 거야.
선생님은 엄마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딴 대답을 했어.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느냐고 물었어. 선생님은 엄마의 병 이전의 난 어떤 사람이었냐고, 어떤 날들을 보냈냐고 물었어, 강박증에 힘들었던 거, 예민한 성격, 두서 없이 말한 것 같아. 그리고 다시 일주일치 약을 받아들고 나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라디오에서 버스커버스커의 '잘할 걸'이 흘러 나왔어. 이거 좀 드라마 같네. 거지 같은 드라마를 살고 있네, 생각했지.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거야. 어제 병원 가는 길에 스쳐간 여자의 말이 갑자기 귓가에 울린다. “오빠가 하지 말라는 건 나는 안 하잖아!” 그 여자도 자기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는 거지.
하지 말라는 걸 하지 않는 건 사랑일까. 그 여자에겐 사랑일 거야. 그걸 기대하는 마음은 사랑일까. 사랑으로 어디까지 허락될까. 엄마는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 걸 안타까워 해. 정신적으로 힘들다면 그건 네가 아니라 네 동생일 건데. 넌 견딜 수 있는 아이인데.라고 말하더라. 있잖아, 그 말 듣는데 섭섭했지만 화는 안 났어. 약을 먹었기 때문일까.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아. 엄마는 마흔이 다 되어 가는 자식인 날 여전히 아주 애틋하게 끌어안고 잘 자라고, 건강하고 행복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고, 어제는 볼에 뽀뽀도 해줬지. 우린 무수한 뽀뽀를 주고 받는 사이. 그러니까 엄마의 사랑 안에서 엄마는 무얼 해도 괜찮아. 요즘은 약기운에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하곤 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너무 두서가 없다. 너는 곧 또 한국을 떠나지. 가서 편지 써 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게. 남은 9월의 우리 더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자.
닐리에게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