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슬프다.
이 문장은 엄마의 정신과 상담 문진표에 적힌 첫 문항이었어. 거기에 매우 그렇다, 그렇다 등의 선택지가 있었을 거야. 엄마는 그렇다.에 체크를 했어. 그 외에도 많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나는 슬프다.라는 한 문장만이 마음에 오래 남았어. 엄마는 분명 슬펐고 ‘매우 그렇다’에 체크를 해야 했음이 분명했지만, 엄마의 마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길 허락지 못하는 것 같았지.
나도 슬픈가.
말로 다할 수 없이 슬프면서도, 그 슬픔이 끝내 '매우 그렇다'에 닿는 것을 경계하는 엄마처럼. 나도 좀처럼 제대로 슬퍼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아. 요즘 우리 가족이 지내는 모습을 돌이켜 보면 그건 어떤 유전적인 기질인 듯도 하다. 얼마 전 집에 채워 넣을 가전을 몇 사면서 집에서 음악 들으며 춤을 추자고 이십만 원이 조금 넘는 스피커를 샀어. 처음의 목적대로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고 조금 쉬었다가 음악을 틀고 춤을 춰. 엄마는 몸에 힘이 없으니 춤이 잘 되질 않고 나는 막춤을 춘다. 막춤을 추는 나를 따라 막춤을 추는 엄마. 춤을 추며 웃는 엄마랑 나. 그러다 보면 우리 집 조그만 강아지는 이 집안의 인간들이 모두 정신을 놓았나, 두려운 듯 엄마에게 매달리지. 어리둥절한 표정의 작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우리는 또 웃어.
어찌 되었든, 우리는 슬픔 안에서도 그렇게 순간을 붙들고 오래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인가 봐. 마음이 조금 정리가 된 모양인지, 오죽하면 요즘 내 장기는 엄마의 검사 결과를 듣던 날, 엄마가 울 때마다 담당 교수님이 짓던 표정을 흉내 내는 거야. 그걸 흉내 내면 왜인지 엄마가 참 좋아하거든. 마음이 약한 교수님의 어찌할 줄 몰라 하는 표정. 어찌할 줄 몰라, 마치 함께 슬퍼하는 것만 같은 표정. 그 모습을 떠올릴 때면 한편 위로도 되나 봐. 엄마는 작은 거에도 감동하는 사람이니까.
며칠을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있던 엄마는 지난 수요일 다니던 정신과를 찾아 약을 새로 지어 오셨어. 약 덕분인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사이 또 새로운 의욕이 솟아 완전히 상관없는 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열망에 빠지셨지. 이제 엄마의 감정선은 그 결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나는 그게 또 두렵다가도 웃는 엄마는 귀여워서, 우는 엄마는 애처로워서 거의 모든 시간 엄마를 따라 흔들거려. 갑자기 이사를 가고 싶어 하는 엄마의 그 출처 모를 열망에 오늘은 네게 이야기했듯 H동에까지 갔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생활하시는 집을 구경했는데,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세간살이, 신기할 정도로 통일성이 없는 이불들, 베란다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속옷들이 – 이 속옷들은 놀랍게도 모두 눈이 부시게 새하얀 상태였는데 때문에 흐린 눈으로 애써 외면해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야 - 누가 와서 보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태연히 놓여 있어서 한편 웃음이 났어. 결론적으로 그 집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어 우리의 다음 집 후보에 들지 못했지만 동네는 참 좋더라. 엄마 취향이 분명했어.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이렇게 엄마가 관심을 가지고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돼.
집을 보고 나서 너무 배가 고파 쌀국수 한 그릇에 맥주 한 병을 시켜다가 저녁으로 먹었다. 오늘도 참 더웠는데, 어째서인지 여름의 끝처럼 느껴졌어. 입안 가득 쌀국수 넣고 꼭꼭 씹어 먹으며, 살면서 여름은 내게 그리 다정했던 적이 없었네, 속엣말을 했어. 그러니 잘 가라, 내년 여름은 좀 평안하기를.
분주히 각자의 매일을 살면서도 너와 늘 함께라 생각하면 든든해. 곧 다시 편지할게, 내내 건강히 지내자.
닐리에게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