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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Aug 29. 2021

성격이 아니라 장이 예민하대요

과민성 대장 증후군 | 그게 뭔데?

- 아직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드디어 내게 정확한 병명이 부여되나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최근에 뭐 잘못 먹은 음식이 있을 수 있어요. 술 드세요?

- 아니요. 전혀요.

병원에서 술 담배 하지 말라는 얘기 들을 때마다 억울했다. 술은 일 년에 한두 번 마시고 담배는 평생 한 번도 안 폈다. 차라리 술 담배를 해서 아프다면 그 둘을 끊으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 나는 마치 열심히 공부하지만 성적은 안 좋은 학생이 교무실에 불려 가듯 병원에 갔다. 


- 선생님. 성적이 안 나와요.
- 수업 시간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면 잘 나올 거야.
- 이미 그러고 있는데요.


- 의사 선생님. 건강이 안 좋아요.
- 술 담배 안 하고 꾸준히 운동하면 좋아질 거예요.
- 이미 그러고 있어요.

그러고 있다고요!


- 술은 계속 드시면 안 되고요. 지금 장이 예민한 상태이니까 먹는 건 조심해야 해요.

- 그럼 뭘 먹으면 안 돼요?

- 너무 많죠.

의사 선생님의 말이 너무 무책임하게 들렸다. 다음날 점심 메뉴 생각하다 잠드는 사람한테, 친구들이랑 만날 때 식당 먼저 검색하는 사람한테, 네이버 지도에 859개의 맛집(카페도 합치면 1000개가 훨씬 넘는다)을 저장한 사람한테, 그렇게 가볍게 그렇게 무거운 말을 하다니. 내가 망연하게 선생님을 바라보자 선생님이 이어 말했다.

- 커피, 밀가루, 튀김, 인스턴트 음식 다 안 돼요.

- 요구르트는요?

배 아프면서부터 장 운동에 좋다는 요구르트를 매일 마셨는데, 매미 언니는 그것도 먹지 말라고 했었다.

- 요구르트도 지금은 안 좋아요. 지금 장이 활발해져 있는 상태라서 그걸 부채질하는 음식은 다 안 좋아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 줄지어 서있는 요구르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딸기맛, 청포도맛, 플레인....... 플레인 맛은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겠지.


집에 와서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대해서 찾아봤다.

장관의 기질적 이상 없이 만성적인 복통 또는 복부 불편감, 배변 장애를 동반하는 기능성 장 질환

이 정의에서 내가 해당되지 않는 부분은 '만성'뿐이었다. 이 쪽에서는 한 달 고생한 걸로는 '만성' 축에도 안 껴주나 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연령에서 2.2~6.6%의 유병률을 보일 정도로 꽤 흔한 질병인데, 특이한 점은 서울에 사는 이들의 유병률이 11.6%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고 했다. 게다가 특히 젊은 여성에게 잘 나타난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나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의 정확한 타겟층이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 증상에는 배변 장애, 복통, 복부 팽만감과 함께 두통, 월경불순, 불안, 초조, 우울 등이 잘 동반된다고 한다. 복부 팽만감이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장에 가스가 차서 팽창하는 것이었다. 복부 팽만증 사진의 환자들은 모두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는데, 내 복부의 모습과 비슷했다. 근래 먹은 것도 없이 유독 배만 살이 쪘는데, 살이 아니라 기체로 채워졌던 것이었다. 


요즘에도 음식을 잘못 먹으면 배 속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났다. 몸 안에서 기체가 생성되는 과정을 듣는 일은 재밌지만, 그래도 가스가 찬 상태로 생활을 하는 건 고역이었다. 한 번은 상무님 방에서 둘이 미팅을 하다가 배 속에서 폭탄이 터질 것 같았다. 상무님 방에서 실수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급하게 노트북을 닫으며 "그럼 이 부분은 추가로 확인하고 다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상무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병원에 가기 전에 사뒀던 요구르트는 결국 모두 회사 냉장고로 이사를 시켰다. 요구르트는 이제 내게 뱃속에 든 폭탄에게 주는 먹이와 다름없었다.

For free: Yogurt. Never drunk.
무료로 가져가세요. 마시지 않은 요구르트. 

요구르트 앞에 이런 포스트잇을 붙였다. 몇 시간 후 회사 냉장고를 다시 열었을 땐 요구르트는 없어지고 포스트잇만 남겨져 있었다. 이 요구르트에 깃든 슬픈 사연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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