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민성 대장 증후군 | 건강하던 내가 갑자기 왜 이럴까요?
시작은 한남동이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친구들과 갔던 카페에서 한 시간 동안 화장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렸다. 그중 한 번은 '청소 중' 팻말이 화장실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음이든 속이든 급한 나로서는 별 수 없이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청소하는 직원이 20분 후에 오라고 말했지만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을 못하고 애처롭게 그분을 바라봤다. 결국 급하면 먼저 사용하라며 직원이 자리를 비켰다. 나는 그 마음이 반갑고 고마웠는데,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화장실을 다른 누군가가 청소하는 게 민망했고, 내가 사용하는 동안 직원이 하릴없이 기다릴 생각을 하니 염치가 없었다. 결국 그냥 청소 끝나면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자마자 후회했다. 그 후 20분 동안은 친구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집에 돌아오면서 그날 먹은 음식을 찬찬히 생각해봤다. 아침은 안 먹었고, 점심은 집에서 매일 먹는 반찬과 함께 밥을 먹었고, 저녁은 한식집에 갔다. 해산물도 없었고, 덜 익은 음식도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카페에서 먹었던 '크로플'이었다. '크로플'은 '크루아상'과 '와플'을 합친 말로, 크루아상 도우로 만든 와플을 일컫는다. '맛있는 거' 더하기 '맛있는 거'는 당연히 맛있지만, 지난번에도 같은 카페에서 크로플을 먹고 속이 안 좋았던 게 기억났다. '그 카페 위생 상태가 안 좋았나? 재료가 상했나?' 카페를 원망했다가 크로플을 같이 먹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멀쩡한 걸 확인하곤 다시 범인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다음날-토요일-엔 집에서 죽만 먹었더니 속이 좀 괜찮아졌다. '역시 뭘 잘못 먹었었나 보다' 생각하고 일요일에는 김치찌개에 밥도 먹고 스콘도 먹고 친구랑 달리기를 하러 한강에 갔다. 그때까진 괜찮았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버스를 타고 한강 공원에 갈 때까지만 해도,
공원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는데.
오 분쯤 달리니까 괜찮지 않았다.
헛 둘 헛 둘 하며 오른발 왼발을 리듬감 있게 내딛을 때마다 내 몸은 위아래로 흔들렸고, 그 속에 있는 것도, 또 그 속에 속에 있는 것도 함께 흔들렸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이미 저만치 앞서 있던 친구는 벌써 지치면 어떡하냐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좀 걸어야겠다고 말하고 눈으로는 화장실을 급하게 찾았다.
며칠 동안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속이 안 좋아서 다음 날 죽을 먹으면 좀 괜찮아졌다가 그다음 날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으면 다시 안 좋아지고....... 속이 언제 불편할지 몰라서 친구들과 약속 잡는 것도 꺼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할 땐 무조건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만났다. 몰은 층마다 화장실이 있으니까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 져도 두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용산 아이파크몰에는 '조 앤 더 주스'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지금 몸 상태에선 카페인도, 우유도 안 좋다는 걸 알았지만, 한국에서 건강한 주스를 파는 카페는 정말 드물었다.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게 없어서 한참 동안 메뉴판만 바라보던 내게 '조 앤 더 주스'는 더할 나위 없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병원에 갈 생각은 못 했다. 토하거나 열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럼 장염도 아니었고, 단지 속이 안 좋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가장 저렴한 유산균을 주문했다. 속이 좀 안 좋을 뿐인데, 이렇게 오래가는 건 역시 내가 유산균을 안 챙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문한 유산균은 가루형으로 요구르트 맛이 났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유산균을 먹고 출근하기 전까지 신호가 오길 기다렸다. 집에서 화장실을 못 들르고 출근한 날엔 하루 종일 불안했다. 배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딜 가든 화장실이 눈에 안 보이면 불안했고, 회사에서 미팅이라도 잡히면 숨이 턱턱 막혔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미팅은 제일 먼저 가서 미팅룸의 입구 자리를 차지했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그러다 병원에 가게 된 건 매미 언니의 말 때문이었다.
"너 그러다 만성돼."
다른 사람들이 병원 가라고 할 때는 "이러다 말겠죠.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기침 좀 한다고 매번 병원에 갈 나이는 이미 지나왔고 또 아직 안 왔으니까. 그런데,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만성이 되는 건 다른 얘기였다. 언니는 내가 그간 겪었던 걸 듣더니, 작년에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었고 과민성 대장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니. 그런 건 예민한 사람들이 스트레스받으면 화장실 가고 싶어 하는 걸 일컫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그냥 뭔갈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먹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 전에도 잘못 먹었는데 어제도 잘못 먹고 오늘도 잘못 먹어서 이런 줄 알았는데. 이제 유산균도 먹기 시작했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면 유산균도 함부로 먹으면 안 될 거야. 배에 자극 주는 건 안 좋다고 들었어."
나는 한 달 만에 병원에 갔다.
+
한 달이나 병원에 안 간 것을 너무 미련스럽게 볼까 봐 덧붙이자면, 나중에 피부과에 갔을 때 배 아파서 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그럼 피부과 약은 처방 안 해줄게요. 보통 배 아프다고 병원에 잘 안 가는데 얼마나 아프길래 간 거겠어요.'라고 말했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 많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하하.
++
병원에 갔더니 유산균을 약으로 처방해줬다. 유산균은 과민성 대장증후군에게도 좋은 걸로.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