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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음악과 황금빛 시간이 흐르는 곳

by 이자까야 Mar 21. 2025
슈테판 성당


비엔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따라 다시 한번


비행기가 천천히 착륙을 준비하자, 창밖으로 비엔나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도나우 강,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잔잔한 저녁빛.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엔나에 다시 왔다.


비엔나는 처음부터 특별한 도시였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곳인지도 모르던 시절, 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이곳에 가고 싶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


그 선율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리듬, 우아하면서도 자유로운 선율.


그 음악은 내 마음 한구석에 ‘비엔나’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비엔나를 찾았던 날, 나는 그 음악이 단순한 곡이 아니라 비엔나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오페라 하우스, 고풍스러운 카페에서 흐르던 왈츠, 거리에서 연주되던 클래식 음악.


그 모든 것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처럼 우아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첫 비엔나 여행은 기억 속에 아름다운 선율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그 감동을 찾으러 왔다.


비엔나 공항에 도착해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익숙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 조용하면서도 세련된 공항의 분위기, 오가는 사람들의 느긋한 걸음.

처음 왔을 때의 긴장과 설렘이 이제는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비엔나는 이제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나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비엔나 도심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지난 여행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이미 알고 있는 그 감동을 다시 찾으러 가는 여행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비엔나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첫눈에 반한 도시를 다시 찾았을 때의 기분이란,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하는 묘한 감정이다.


그때 그 느낌이 그대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엔나를 발견하게 될까?


택시는 어느새 도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번 여행이 어떤 선율로 흐를지 생각했다.

다시 찾은 비엔나, 그 선율이 여전히 아름답기를 바라며...


1일 차: 예술과 역사의 선율을 따라


벨베데레 궁전, 황금빛 예술과 역사의 정원 속을 걷다


비엔나에서의 첫날 아침, 나는 가장 먼저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정원과 화려한 바로크 건축, 그리고 클림트의 걸작이 기다리고 있는 곳.


지하철에서 내려 궁전으로 향하는 길, 차가운 아침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따뜻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한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족들이 거닐었던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도시는 나를 특별한 시간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흔적을 따라 궁전 입구에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벨베데레 궁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한 시대의 영광을 담아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17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유럽 최고의 가문, 합스부르크 왕가.


그들의 위엄과 권위를 그대로 담아낸 것이 바로 이곳이었다.


궁전의 주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명장, 오이겐 왕자(Prinz Eugen von Savoyen)였다. 그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상징할 거대한 여름 궁전을 짓기로 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이 지금의 상(上) 벨베데레(Upper Belvedere)와 하(下) 벨베데레(Lower Belvedere)이다.


바로크 양식의 정교한 조각들과 대칭적으로 설계된 아름다운 정원, 궁전 사이를 잇는 긴 산책로까지.


나는 이곳이 단순한 궁전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엄을 예술로 승화한 공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이겐 왕자는 결국 이 궁전에서 단 한 번도 살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이곳은 합스부르크 황가의 예술 컬렉션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예술을 직접 만나러 가고 있었다.


벨베데레 미술관, 황금빛 클림트를 만나다


궁전 내부로 들어서자, 한층 더 고요한 공간이 펼쳐졌다. 웅장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홀을 지나 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Der Kuss)’ 앞에 섰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황금빛 캔버스.

화면 한가운데, 서로를 꼭 끌어안은 남녀의 모습.

황금빛으로 감싸인 그들의 몸, 화려한 패턴과 유려한 곡선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


나는 그림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던 작품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순간,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이 멎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었다.


클림트는 인간의 욕망과 열정, 그리고 황홀경의 순간을 가장 아름답고도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특히 황금빛의 사용은 우연이 아니었다. 클림트는 비잔틴 모자이크의 영향을 받아 금박을 이용한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신비로운 성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뜨거운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

그녀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문득, 클림트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비엔나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적인 예술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비엔나 분리파(Wiener Secession) 운동이었고, ‘키스’는 그 운동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나는 그림 앞에서 생각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그림이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대를 넘어 언제나 우리를 흔들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 황금빛 캔버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곳이 비엔나에서 가장 황홀한 공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벨베데레 궁전의 정원을 걸으며 나는 다시 한번 이 도시에 다시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비엔나는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이곳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웅장한 건축물, 그 속에서 피어난 클림트의 황금빛 예술, 그리고 여전히 그 유산을 이어가고 있는 거리의 음악들.


비엔나는 한 시대가 끝나도 여전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나는 천천히 궁전을 빠져나오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쇤부른 궁전, 황제의 정원을 거닐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황금빛 클림트의 세계를 경험한 후, 나는 또 다른 역사와 마주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비엔나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웅장한 궁전, 쇤부른 궁전(Schloss Schönbrunn).


이곳은 단순한 궁전이 아니다. 쇤부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을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이며, 비엔나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걸작이었다.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궁전은 과거 황제들의 여름 별궁이었지만, 그 규모는 감히 ‘별궁’이라고 부르기엔 거대했다.


그곳에는 한 제국의 영광과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궁전 입구로 향하는 길, 멀리서부터 거대한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노란색의 웅장한 건물, 그 앞에는 끝없이 넓게 펼쳐진 정원.


나는 입구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황제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쇤부른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그 시작은 레오폴트 1세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화려한 모습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쇤부른을 여름 궁전으로 삼으면서, 이곳은 곧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등장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시씨 황후).


이곳은 그들이 사랑하고, 때로는 고독에 빠졌던 공간이었다. 특히 시씨 황후는 쇤부른을 단순한 궁전이 아니라, 그녀만의 은신처로 여겼다고 한다.


나는 궁전으로 들어서며 과거 이곳을 걸었던 황제와 황후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궁전 내부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유럽 왕실 문화의 절정이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홀, 섬세하게 장식된 벽면, 황금빛 장식과 붉은 벨벳이 어우러진 응접실.


이곳에서 황제들은 유럽의 정치를 논했고, 연회를 열었으며, 제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가장 유명한 공간 중 하나는 ‘거울의 방(Spiegelsaal)’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응접실이 아니었다. 한때, 여섯 살이던 모차르트가 황제 앞에서 연주했던 공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 방을 걸으며 그때의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어린 모차르트가 건반을 두드리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장면.


쇤부른은 단순한 궁전이 아니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운 공간이었다.


다음으로 마주한 곳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침실. 이곳은 궁전의 다른 공간들과 달리 유난히 소박했다.


그는 평생을 오스트리아를 위해 헌신했던 황제였다. 쇤부른에서 태어나, 쇤부른에서 죽었다.

이 화려한 궁전 속에서 그는 단순한 나무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이 방에서 궁전이 단순한 화려함의 상징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궁전 내부를 둘러본 후, 나는 정원(Garten)으로 나왔다.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된 광활한 정원, 끝없이 이어지는 대칭적인 조경, 그리고 그 끝에 자리한 글로리에테(Gloriette).


글로리에테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승리의 기념비’로 세운 건축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장소 중 하나다.


나는 언덕 위의 글로리에테까지 걸어 올라갔다.


비엔나의 공기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래로는 황금빛 궁전이 펼쳐지고, 그 뒤로 비엔나 도심이 이어졌다. 멀리 도나우 강까지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서서 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쇤부른은 단순한 왕궁이 아니었다. 이곳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고, 여전히 비엔나의 중심이 되어 그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궁전 정원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곳이 특별한 이유를 떠올렸다.


쇤부른에는 황제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모차르트가 연주한 피아노의 잔향이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황후의 고독한 시간이 스며 있었으며, 비엔나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궁전 앞 광장을 걸어 나오며 생각했다.


비엔나는 음악과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오래된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쇤부른 궁전을 돌아보았다.


궁전은 여전히 변함없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금빛 영광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엔나 중앙 묘지(Zentralfriedhof),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의 마지막 안식처


쇤부른 궁전을 나와 나는 다시 비엔나의 또 다른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향하는 곳은, 이 도시가 사랑했던 음악가들이 잠든 곳.


비엔나 중앙 묘지(Zentralfriedhof)


비엔나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이곳은 클래식 음악의 수도이자, 수많은 음악가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후에도 비엔나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이곳 공원묘지(Central Cemetery, Zentralfriedhof)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제 나는 그들의 흔적을 따라, 음악이 흐르는 길을 걸으려 한다.


비엔나의 묘지는 다른 도시의 묘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보통 묘지라고 하면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떠오르지만, 비엔나의 공원묘지는 달랐다.

이곳은 단순한 ‘죽은 자들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었고,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장소였다.


공원처럼 조성된 넓은 묘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가끔씩 벤치에 앉아 독서를 하거나 사색에 잠긴 모습도 보였다.


마치 이곳은 죽음을 애도하는 곳이 아니라, 그들의 예술을 기억하고 기리는 공간 같았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내가 사랑하는 음악가들의 이름을 직접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그의 묘비 앞에 서자,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곳에, 그가 잠들어 있다니."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나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다.


<교향곡 9번 ‘합창’>

<비창 소나타>

<운명 교향곡>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도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들을 수 없는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선율을 만들어 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조용한 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묘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의 음악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선율은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몇 걸음 옮겨, 바로 옆에 있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묘지로 향했다.


슈베르트는 비엔나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선율은 여전히 길게 울리고 있었다.


<아베 마리아>

<송어>

<미완성 교향곡>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남기고 떠났다. 그 묘비 앞에 서니, 그의 음악이 더 깊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곳에 잠든 당신의 선율은, 언제나 이 도시의 공기 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걸음을 멈춘 채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하지만 그는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그는 비엔나 북쪽의 무덤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천재였지만, 죽음은 그에게 가혹했다. 궁정음악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는, 죽을 때는 가난한 음악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나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이곳 공원묘지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모차르트는 생전에는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 그의 음악은 영원히 살아 있다.


비엔나의 카페에서, 궁전에서, 그리고 수많은 공연장에서 그의 음악은 여전히 연주되고 있다.


나는 기념비 앞에서 조용히 손을 모았다.


그의 삶은 끝났지만, 그의 음악은 비엔나의 공기 속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비엔나 공원묘지를 떠나며, 나는 다시 한번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음악이 태어나고, 음악이 숨 쉬고, 음악이 영원히 기억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남긴 선율을 따라, 그들의 마지막 길을 걸었다.


공원묘지를 나오며 나는 한 번 더 뒤돌아보았다.

어쩌면, 비엔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아니라, 그들의 음악이 영원히 살아 있는 또 다른 무대가 아닐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여러분의 음악은, 여전히 이 도시를 아름답게 울리고 있습니다."


2일 차: 비엔나의 숨결을 따라


슈테판 성당, 비엔나의 심장 속을 걷다


비엔나에서의 둘째 날 아침, 나는 도시의 중심으로 향했다.


비엔나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곳.


바로,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이다.


비엔나의 어느 골목을 걷든, 어느 광장에 서든, 이 성당의 첨탑은 시야에 들어온다.

도시의 중심에서 수백 년 동안 비엔나를 지켜온 존재.


오늘, 나는 이 성당 속으로 들어가 비엔나의 심장을 직접 마주하려 한다.


슈테판 성당 앞에 서자, 나는 다시 한번 이 건축물의 위대함에 압도되었다. 거대한 고딕 양식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그 위로는 화려한 색채의 기와지붕이 펼쳐져 있었다.


이 성당의 가장 인상적인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지붕이다. 단순한 돌과 벽돌의 조합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패턴 작품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된 타일들이 빛나고 있었다.


녹색, 노랑, 파랑, 흰색이 어우러져 독수리 문장이 새겨진 이 지붕은 비엔나의 전통과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고풍스럽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 색감이 현대적인 감각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스테판 성당도 아픈 상처를 품고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비엔나는 전쟁의 마지막 혼란 속에 있었다. 독일군은 철수했고, 연합군의 폭격과 포격이 이어지던 그때, 슈테판 성당은 직접적인 폭격을 맞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여파 속에서 화염에 휩싸였다.


전투와 혼란 속에서 누군가 던진 불길이 주변 건물로 번졌고, 그 불꽃이 결국 비엔나의 상징인 이 성당까지 삼켜버렸다.


그날 밤, 슈테판 성당의 아름다운 색타일 지붕이 불꽃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늘 높이 솟아 있던 첨탑은

더 이상 비엔나를 지키는 상징이 아니었다.


타버린 목재 구조물들이 성당 내부로 떨어지며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공간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은 비엔나의 많은 것을 무너뜨렸고, 그중에서도 이 성당의 파괴는 이 도시의 가장 큰 상처 중 하나였다. 성당을 바라보던 비엔나 사람들은 이곳이 다시 세워질 수 있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슈테판 성당은 그저 건축물이 아니었다. 이곳은 비엔나의 ‘심장’이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결코 이곳을 잃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비엔나 사람들은 가장 먼저 슈테판 성당을 복구하기로 했다.


도시는 여전히 전쟁의 잔해 속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지만, 이 성당만큼은 다시 세워야 했다.


정부와 종교 단체뿐만 아니라, 비엔나 시민들까지 나서서 재건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돌 하나하나를 쌓고, 잃어버린 조각을 복원하며, 성당은 다시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2년, 슈테판 성당은 다시 문을 열었다.


타일로 장식된 지붕도, 첨탑도, 무너졌던 내부 공간도 모두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이 성당의 진정한 복원은 단순히 무너진 건축물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비엔나의 영혼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슈테판 성당의 지붕은 단순한 건축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곳에는 비엔나의 역사와 정체성이 담겨 있다.

성당이 재건될 때, 지붕의 모자이크 패턴은 새로운 의미를 담아 다시 디자인되었다.


한쪽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독수리 문장, 다른 한쪽에는 비엔나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새겨졌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비엔나가 다시 일어났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새겨진 색색의 타일들은 비엔나가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도시라는 증거였다.


나는 한동안 성당을 올려다보며 비엔나 사람들이 왜 이곳을 ‘비엔나의 심장’이라 부르는지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의 환한 빛과는 정반대의 공간이 펼쳐졌다.


어둠이 깔린 듯한 분위기,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공기, 그리고 곳곳에 반짝이는 촛불들.


웅장한 기둥이 늘어선 성당 내부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마치 시간 속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바닥에는 오래된 대리석이, 벽에는 수백 년 전의 조각과 프레스코화가, 그리고 천장에는 정교한 고딕 아치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한쪽에는 조용히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다른 한쪽에는 천천히 공간을 감상하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 중간에서 그저 이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슈테판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역사적인 순간들이 스며 있다.

특히 음악의 도시 비엔나답게, 이 성당은 ‘모차르트의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죽은 후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나는 모차르트가 이 성당을 드나들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천재적인 선율을 만들어내던 그가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을까?

이 높은 첨탑 아래에서 어떤 영감을 떠올렸을까?


그의 음악이 비엔나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이 성당도 여전히 그를 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오늘, 나는 이 성당의 전망대에 오르려 했다. 높이 136m의 첨탑 위에서 비엔나를 내려다보는 순간을 기대했지만, 공사 중이라 아쉽게도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뭔가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 다시 돌아올 이유를 만들어 주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성당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빈 왕실 보물 박물관, 신과 황제가 남긴 유산을 마주하다


슈테판 성당을 나와 비엔나의 거리를 걸으며 아직도 성당에서 느꼈던 감동을 곱씹고 있었다.


비엔나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이 도시는 시간과 역사 속을 걷는 곳이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번 목적지는 빈 왕실 보물 박물관(Kaiserliche Schatzkammer Wien)이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수백 년의 유산이 보관된 곳이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왕실 보물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황제들의 화려한 보석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성유물(聖遺物)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신과 황제의 유산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깥의 분주한 거리와 달리 이곳은 조용하고 엄숙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한때 유럽을 지배했던 황제들이 소유했던 수많은 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이 왕관은 금빛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정교하게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왕관을 보며 생각했다. 한때 이 작은 보석 하나하나가 한 나라를 넘어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상징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그 왕관은 유리장 속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흔적은 이렇게 남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를 가장 깊이 감동시킨 것은 보석도, 황금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찔린 창(성창, Holy Lance)을 마주했다.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이 작은 창 조각이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성유물(聖遺物)이었다.


이 창은 로마 병사 롱기누스(Longinus)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유리 케이스 안에 전시된 그 작은 창을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 창을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경 속 사건이 현실이 되는 듯 느껴졌고, 어떤 신비로운 감각이 스며드는 듯했다.


옆에는 예수님이 못 박혔던 십자가의 조각도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나무 조각 하나.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어떤 보석보다도 더 무거웠다.


나는 한동안 그 앞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신앙을 떠나, 이 유물이 지나온 시간을 생각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수많은 이들이 이 유물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결국 이곳 비엔나까지 오게 되었다.


이 작은 창과 십자가 조각이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왔을까?


나는 천천히 손을 모으며 이 순간을 가슴에 새겼다.


성유물(聖遺物)의 감동을 가슴에 담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보물을 발견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에메랄드(Emerald Unguentarium).


어떤 가공도 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색을 그대로 품은 채, 마치 거대한 유리 조각처럼 빛나고 있는 에메랄드와 마주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큰 보석을 본 적이 없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그 깊고 신비로운 녹색이 서서히 변하는 것 같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 에메랄드는 한때 합스부르크 황제의 소유였으며,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보석으로 가공된 적이 없다고 한다.


나는 보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보석은 한때 황제의 권력을 상징했지만, 이제는 단순한 자연의 신비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변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보석이 어떤 왕관에 세팅되지 않고 이대로 보존된 것이 오히려 더 신비롭고, 더 가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빈 왕실 보물 박물관에서 나는 그저 화려한 보석을 본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유럽을 지배했던 황제들의 흔적이 있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신성한 순간들이 담겨 있었으며, 수백 년을 지나온 보물들이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물들은 더 이상 황제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들은 떠났고, 권력도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물은 지금도 우리 앞에서 말없이 그들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성창과 십자가 조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보석보다, 왕관보다, 그 작은 조각들이 더 깊은 의미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나서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진정으로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또 다른 감동을 만나러 비엔나의 밤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엔나의 밤, 선율이 흐르는 순간


빈 왕실 보물 박물관을 나와 비엔나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머릿속에는 여전히 성창과 십자가 조각의 감동이 맴돌고 있었다.


이 도시는 매 순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나를 다른 시간 속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또 다른 시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엔나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이곳은 음악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이 도시의 공기 자체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비발디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선율로 채워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선율을 직접 몸으로 느낄 시간이었다.


비엔나의 작은 콘서트홀로 들어서자, 웅장한 오페라 극장과는 다른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수백 석이 넘는 커다란 공연장이 아니라, 마치 귀족들의 작은 살롱처럼 관객과 무대가 가까운 공간.


이곳에서는 음악이 무대 위에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감싸며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있었다.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더니 무대에 앉은 연주자들이 조용히 조율을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현을 튕기는 소리,

피아노의 건반이 가볍게 울리는 소리.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지휘자의 조용한 움직임.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비엔나의 밤이 완성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곡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곡은 모차르트. 비엔나가 낳은 천재, 그리고 이 도시에서 영원히 남은 이름.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흘러갔다.


경쾌하지만 우아한 바이올린 선율, 깊고 부드러운 피아노의 화음.


이어지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한 음 한 음이 쏟아질 듯 쏜살같이 흘러갔다. 바이올린이 긴장감 넘치게 떨리면서 한겨울의 거센 바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선율에 온몸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비엔나의 밤, 그 속에서 나는 음악의 바다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모든 곡들이 한 번쯤 들어본 익숙한 곡들이라 더 깊게 빠져들 수 있었다.


연주 중간, 소프라노와 테너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익숙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이 공간 전체를 감싸 안았다. 조수미처럼 유명한 성악가도 아니었고, 음향이나 무대 장치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노래는 나에게 완벽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곡은 비엔나를 대표하는 왈츠 곡, 내가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였다.


바이올린이 첫 선율을 연주하는 순간, 나는 온몸이 전율하는 걸 느꼈다. 그동안 수없이 들었던 곡이었지만, 이곳, 비엔나에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도나우 강 위를 흐르는 물결, 그 위를 춤추듯 떠다니는 보트, 그리고 왈츠를 추는 사람들.


이 곡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비엔나 자체였다.


경쾌한 리듬이 공연장 안을 가득 채웠고, 관객들도 하나둘씩 그 리듬을 따라 살짝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비엔나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것은 박동이 아니라, 바로 이 왈츠였다.


음악이 끝나자, 공연장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 음악이 끝난 후에도, 감동은 남아 있었다.


이 도시는, 어디에서든 음악이 흐르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선율 속에서 비엔나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공연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여전히 음악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모차르트의 선율, 비발디의 격정적인 바이올린,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비엔나의 밤은 그저 어둠이 깔리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빛이 함께 춤추며 도시를 더욱 황홀하게 만든다.

공연을 마치고, 나는 이 감동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 일정으로 비엔나 시청사(Rathaus)를 찾기로 했다.


비엔나의 밤을 가장 아름답게 즐길 수 있는 곳, 그리고 겨울이면 빛나는 스케이트장이 펼쳐지는 곳.


지금, 나는 비엔나의 마지막 밤을 향해 걷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을 지나 비엔나 시청사 광장에 도착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시청사 건물, 수많은 작은 첨탑과 정교한 조각들, 그리고 그 위로 황금빛 조명이 비추며

건물 전체를 마법처럼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고풍스러운 시청사가 빛나는 모습은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엔나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도시였다. 나는 천천히 시청사 앞 광장으로 걸어가며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 또 하나의 마법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바로, 비엔나 시청사 스케이트장(Wiener Eistraum)이었다.


겨울이면 이곳 광장은 거대한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한다.


따뜻한 노란빛 조명이 스케이트장을 감싸고, 사람들은 빙판 위에서 마치 왈츠를 추듯 유유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을 잡고 깔깔 웃으며 돌고, 연인들은 손을 맞잡고 천천히 빙판 위를 거닐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겨울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스케이트장 옆 벤치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단순한 시청사가 아니라, 비엔나의 밤을 가장 아름답게 비춰주는 빛의 성채였다.

그리고 오늘, 그 빛 아래에서 나는 비엔나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비엔나의 마지막 밤, 기차역 마트에서 찾은 최고의 저녁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을 마치고 난 후

너무 늦어져버렸다. 배는 고픈데, 식당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어느새 거리는 한산해졌다.


‘어쩌지?’


분명 계획했던 마지막 저녁은 좀 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비엔나 스타일의 정찬을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당장 허기라도 채울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


그때 떠오른 곳이 있었다.


기차역 마트.


비엔나 중앙역 근처 마트라면 늦은 시간에도 문을 열어 있을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요리는 아니지만,

맥주 한 캔과 간단한 음식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마트에 도착하니 늦은 밤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늦게까지 여행을 하다 나처럼 식사를 놓친 사람들일까?


나는 맥주 코너로 가서 코젤 캔맥주를 담았다. 그리고 뭔가 간단히 먹을 걸 찾기 위해 식품 코너를 둘러봤다.

그때, 갓 조리된 따끈한 음식들이 담긴 즉석 코너에서 눈에 익은 한 가지를 발견했다.


‘학세(Haxen)’ 겉이 바삭하게 구워진 거대한 돼지 족발.


겉은 노릇하게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익어 있는 학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랑받는 대표적인 요리다.


"이걸 호텔에서 먹어야 한다고?"


처음에는 살짝 우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학세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허기가 너무 심해 지금 뭐라도 먹어야 했다.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굶으며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학세와 맥주를 계산한 후 호텔로 향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학세와 맥주를 올려두었다. 조명을 살짝 어둡게 하고, 캔맥주 뚜껑을 ‘톡’ 소리 나게 따며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학세를 한입 베어 물었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니, 너무 맛있었다.


겉은 바삭하게 구워졌지만, 속살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간이 적당히 배어 있어 별다른 소스 없이도 충분했다.

오히려 학세 특유의 깊은 육즙이 맥주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나는 다시 한입, 그리고 또 한입 베어 물었다.


이게 기차역 마트에서 산 즉석 음식이라니... 내가 배가 고파서 더 맛있게 느껴진 걸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걸까? 둘 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순간, 나는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을 잊지 못할 정도로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멋진 디너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렇게 뜻밖의 한 끼가 더 특별한 기억이 될 줄은 몰랐다.


맥주 한 모금과 함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깨끗이 먹어 치운 후, 나는 생각했다.


"이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비엔나에서 경험한 수많은 예술과 음악, 궁전과 성당, 웅장한 역사와 화려한 공연. 그 모든 것들이 이 도시를 다시 찾고 싶게 만들겠지만, 아마 이 학세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장 깊은 감동을 받는다.


비엔나의 마지막 밤, 나는 기차역 마트에서 산 학세 한 조각으로 이 도시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비엔나, 아직 끝나지 않은 선율


공항으로 가는 길, 기차 창밖으로 스치는 비엔나의 거리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눈에 담겼다.


이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 같았다. 낮에는 우아하고 정교한 선율이 흐르고, 밤에는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왈츠가 흘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아름다운 선율의 끝에서 아쉬움을 삼키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비엔나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의 황금빛을 마주했고, 쇤부른 궁전에서 황제들의 시간을 따라 걸었으며, 공원묘지에서 위대한 음악가들의 숨결을 기억했다.


슈테판 성당에서는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 도시가 겪은 역사를 마주했고, 왕실 보물 박물관에서는 영원한 것과 사라지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비엔나의 밤, 공연장에서 울려 퍼진 선율 속에서 나는 이 도시가 왜 ‘음악의 수도’라 불리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왠지 아쉽고도 쓸쓸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도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슈테판 성당의 전망대에 오르지 못했고, 도나우 강변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지도 못했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완벽한 공연을 감상하지도 못했고, 빈 숲(Wienerwald)의 고요한 자연 속을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나는 다시 이곳을 찾고 싶다.


완벽한 여행이란 없고,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 여행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엔나는 아직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더 깊이, 더 천천히 이 도시를 걸을 것이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이 아름다운 도시와 잠시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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