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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Oct 10. 2021

루틴의 시작은 페이퍼 쓰기

모닝 페이지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매일 아침 의식의 흐름을 세 쪽 정도 적어가는 것이다. …… 검열관은 결코 이성적인 목소리가 아니며 오히려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닝 페이지는 심판을 멈추고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경당, 47~49쪽)


제이는 몇 년간 쉬었던 페이퍼 쓰기를 올해 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하루의 글쓰기를 시작할 때마다 손글씨로 노트 양쪽을 채우는 것이다.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아무 말이나 휘갈겨 쓴다.


「아티스트 웨이」의 모닝 페이지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세 쪽을 채우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제이는 퇴근 후 느지막이 디카페인 커피 한잔을 타 놓고 쓰기 시작한다. 워낙 아침잠이 많은데다가, 페이퍼를 씀으로써 미미하게나마 되살린 창작 에너지를 출근해서 일하는 데 소모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 쓰지도 못한다. 결심을 그렇게 완벽히 지켰다면 지금쯤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


쓰는 분량도 줄였다. 저자는 무려 A4 사이즈를 권하지만 손글씨로 A4 세 쪽을 채우자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날마다 지킬 습관은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직접 노트를 만들어 분량을 조정했다. B5 복사지에 선을 인쇄해 표지도 없이 스프링제본한다. 줄간격을 1cm로 넉넉하게 잡아 큼직큼직 시원시원하게 쓸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두 쪽만 쓴다. 소요시간은 20분쯤.


(말이 나와서 얘긴데 요즘 노트나 수첩은 줄간격이 너무 좁은 감이 있다. 넓어봐야 8mm, 좁으면 5~6mm도 흔하다. 한글처럼 받침이 있는 문자를 쓰기에는 너무 촘촘한 거 아닌가 싶다)


페이퍼 쓰기의 예


제이는 전업 작가가 될 날을 준비하며 이때까지 살아왔다(준비만 16년째이긴 하지만). 전업 작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규칙적으로 쓰는 습관’이 아닐까? 지긋지긋한 직장을 마침내 때려치웠는데 슬럼프에 빠져 하루종일 흰 화면만 쳐다보거나, 넷플릭스에 빠져 총천연색 화면만 쳐다보며 자괴감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어쩐단 말인가? 그래서 제이는 페이퍼를 비롯한 글쓰기 루틴을 만드는 데 제법 열심이다. 그 루틴이 한 달을 못 가고 바뀌는 게 문제지만.


페이퍼는 글쓰기의 시동을 걸기에 꽤 좋은 수단이다. 매일 작업하기로 굳게 다짐했더라도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글을 쓰려고 들면 뭘 써야 할지 막막해지기 쉽다. 하지만 쓸 말은 이미 마음속에 있다. 그 위에 각종 잡념과 스트레스, 자기검열의 잔소리 등등이 잔뜩 뒤덮여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 그것들을 페이퍼라는 쓰레받기에 싹싹 쓸어담아 내버리고 나면 그제야 쓰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쓰는 도중에 즉석에서 아무 주제나 잡아 이리저리 굴려보는 것도 재미있다. ‘책상’이나 ‘사과’처럼 세상 재미없는 주제를 잡아도 쓰다보면 쓸거리가 끌려나온다. 주제가 ‘사과’라고 꼭 사과의 모양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사과에 대한 유익한 정보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니다. ‘사과’는 낚시 떡밥일 뿐, 사과를 시작으로 자유롭게 써나가다 보면 뇌 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경험과 생각들이 낚싯줄에 걸리듯 끌려나오게 돼 있다.


생각도 하기 싫은 사건이 일어났거나,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떠올라 페이퍼 쓰기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땐 그냥 그 주제를 피해 다른 얘기를 쓴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용암이 솟구쳐 오를 수 있는 분화구를 굳이 지금 당장 파헤칠 필요는 없다. 분화구 근처를 둘러보면 개울도 있고, 풀꽃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고, 웃기는 사건도 벌어지지 않겠는가? 삶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풀꽃과 마을이 용암보다 덜 중요한 건 아니다.


이처럼 제멋대로 쓰는 제이 스타일 페이퍼가 효과적인 방법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훗날 성공한 작가가 된다면 이것도 ‘파리 리뷰’ 같은 곳에 실리는 작가의 비법이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레시피를 무시한 요리 초보자 꼴이 나는 거겠지. 성공수기란 게 원래 그렇게 결과론적인 거 아닌가? 어쨌든 지금 제이에게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페이퍼 쓰기를 따라해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처음에는 세 쪽을 끝까지 써보기를 권하고 싶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의식이 전환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다. 기차 안에서 다음 객차로, 또 다음 객차로 문을 열고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이런 점을 방금 깨달은 제이도 내일부터는 다시 세 쪽을 채워볼지 고민하고 있다. 이래서 제이의 루틴이 한 달을 못 가고 바뀌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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