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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Oct 25. 2021

아주 구체적인 노동의 대가

로또가 돼도 직장은 계속 다니겠다는 착실한 사람들도 있지만, 제이는 20억 아니라 단 1억만 생겨도 미련없이 사표를 쓸 타입의 인간이다. 2등쯤 해서 4천만원을 탄다면? 음……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라고 세상 쓸데없는 고민에 빠진 제이였다.


마지막으로 로또를 사본 것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확률상 돈만 버릴 게 뻔하다는 합리적 판단 때문이 아니라, ‘끈기가 없어서’. 매주 꼬박꼬박 현금을 뽑아 로또판매점에 들르는 것조차 엄연히 ‘의지력’을 필요로 하는 과업인 것이다. 로또도 매주 자동이체가 가능하다면 당장 신청지 않을까?


아무튼 결론은 사지도 않는 로또에 당첨이 되든지, 최소 1만 권은 팔리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직장이란 곳을 다녀야 한다는 거다.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일년 365일 혼자 처박혀 놀고만 싶은 내면의 제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외면의 제이가 사회생활도 하고 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따금 유난히 일하기 싫은 날이면 제이는 그날 할 일들을 쭉 적어보고, 하기 싫은 정도에 따라 단가를 매겨보곤 한다. 미션 하나하나를 끝낼 때마다 <체험! 삶의 현장>처럼 현금 봉투를 받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랄까?


[하루 수입]

월급 220만 원

=> 일당 평균 10만 원(스트레스 강도에 따라 5만~15만 원)

=> 오늘 일당 15만 원


[세부내역]

상 거래처 미팅: 5만

(회의실 예약>자료 인쇄>용기내기>출발>회의)

보고서 작: 3만원

(파일 만들기>개요 짜기>내용 채우기>퇴고>인쇄)

꼰대 부장 보고: 5만원

(용기내기>출발>보고>보고서 뜯어고치기)

전단지 제작: 2만

(스케치>포샵>인쇄주문>영수증 처리)


이렇게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씩 클리어할 때마다 쫙쫙 줄을 그어 지운다. 그리고 고난 끝에 획득한 돈봉투 15만원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최대한 기분 좋은 걸로 생각해본다. 퇴사 후 자유시간 4일, 1박2일 국내여행, 영화 10편 관람, 온가족 외식&후식, 주말 오전 브런치 8번, 퇴근 후 카페놀이 30번,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한 패딩 구입 등등.


막상 월급을 받으면 월세로 생활비로 술술 빠져나가 행복한 상상은 상상으로 끝나곤 한다. 하지만 오늘의 고생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현생을 버티기 위해 제이는 오늘도 공상의 힘을 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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