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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l 02. 2022

성수동 표류기

매일 발행 91일차

어제는 웬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방불케 하는 모범적인 오전시간을 보냈다. 5시 40분 기상, 잠깐 피아노 치며 잠 깨고 아침 6시 작업 시작, 12시반 브런치 발행(물론 어제 그 글이 6시간 반 내내 쓴 결과물은 아님ㅎ).


아싸, 이제부턴 놀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남들 일할 때 노는' 평일 휴가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빵맛집이 많다며 직장 선배가 추천한 성수동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빵맛집보다도 인터넷 검색하다 찾은 마스카포네 피자 사진이 거부할 수 없게 나를 끌어당겼다.


준비할 때는 시간이 넉넉할 줄 알았는데, 피자맛집 브레이크타임인 3시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초조해져서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빠른걸음으로 걸어갔다. 전날은 그렇게 비가 오더니, 어제는 또 해가 쨍!!!!!!! 쨍!!!!!!!!!!! 하고 직사광선을 쏘아댔다. 반팔옷 아래 드러난 팔이 실시간으로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듯했다. 2시쯤 겨우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주문이 마감되었단다. 흑흑.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었다. 다른 데서 5시까지 놀다가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카페로 피신하니 카운터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거리는 한산한데 가게 안으로만 들어가면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점점 기가 빨리기 시작했다. 평일이 이 정도면 주말은 더한 걸까? 아이스 버터라떼와 레몬케이크를 주문한 뒤, 하나 남은 테이블에 겨우 자리를 잡아 주저앉았다. 레몬케이크가 생각보다 셔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맛을 고소한 버터라떼로 중화시키며 첫 끼니를 해결했다.


이어서 근처 소금빵 맛집에 가봤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쪽에 또다른 출입구가 있고, 그 문밖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게 주문 줄인가요?" 물으니 "네, 소금빵은 나가서 줄 서셔야 됩니다" 한다. 밖으로 나가자 건물 뒤편 주차장을 빙 둘러 50명도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와우, 대박."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기에 앵글 밖으로 슬쩍 비켜섰다.


평소 맛집 앞에 줄까지 서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재미삼아 맨 뒤에 섰다. 대체 무슨 맛이길래 이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어폰을 통해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이 귀에 꽂혔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스마트폰으로 [역행자] 전자책을 읽는데 '하루 2시간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인생이 바뀐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음... 하루 평균 2시간 정도라면 지난 평생 동안 계속 해온 것 같은데, 내 인생은 왜 이렇지? 어쩌면 지금 이게 그나마 달라진 인생인 건가?


줄이 점점 줄어들어 내 앞으로 스무 명쯤밖에 남지 않은 시점, 갑자기 줄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져 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고개를 들고 이어폰을 빼보니 기어코 소금빵이 매진되었단다. 이럴 수가...! 그렇게 줄을 서고도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제 갈 길로 떠나갔다. 다들 나처럼 시간이 남아서 재미삼아 기다려본 거였을까? '아무 말'이 있었지만 내가 이어폰 때문에 못 들은 걸까?


아직도 5시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서울숲에 가보기로 했다. 양산인 척하는 우산을 썼지만 7월 오후의 자외선이 청바지를 뚫는 모기처럼 공격해 왔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입구에 도달했지만 보이는 것은 주차장뿐이었다. 아스팔트 주차장을 힘겹게 헤쳐나가니 드디어 숲 비슷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늘 밑 벤치에 주저앉자, 풀냄새와 흙냄새가 짙게 끼쳐왔다. 그나마 좀 힐링이 되는 순간이었다. 숲에 더 들어가볼까, 당장 되돌아가 영화관 로비 같은 데서 에어컨 바람이나 쐴까, 고민하다가 또 한 번 '여기까지 왔는데'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숲 갤러리 정원


오아시스와도 같은 편의점을 발견하고 생수를 사서 벌컥벌컥 마시니 조금 기운이 났다. 근처에 볼거리가 꽤 있어서 여기저기 구경했다. 갤러리 정원은 기둥 위에 정원을 꾸며, 머리 위로 들꽃과 나무와 하늘이 함께 올려다보였다. 나비정원에서는 꽃잎을 반듯하게 다림질한 것 같은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곤충식물원에는 왠지 커다란 거북이 있었다. 움직임이 없어서 모형인가 했는데 한참 보다보니 고개도 움직이고 눈도 깜박였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커다란 거북과 살짝 뜬금없는 원두막


서울숲을 나오는 길에 최후의 위기를 만났다. 아까 먹은 버터라떼와 레몬케이크의 지방+우유+커피+밀가루 조합에 냉수 원샷 어택이 더해져 대장에서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ㅠㅠ 아랫배가 쥐어짜이는 충격에 사색이 되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땀이 철철 흘렀다. 화장실을 나온 내 몰골은 국토대장정이라도 다녀온 듯했다. 뚝섬역에 도착한 지 3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다.


과연 이 지경이 되어서도 문제의 마스카포네 피자를 먹어야만 하는 걸까? 또다시 고민했지만 그놈의 '여기까지 왔는데'가 나를 식당으로 인도했다. 처음에 들렀던 본점까지 갈 여력은 없어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분점에 들어섰다. 5시 정각. 내가 1등이었다. 결승선 테이프를 끊은 기분이었다. 피자는 이 험난한 여정의 보상으로 충분할 만큼 맛있었다. 쫄깃 촉촉 짭짤 고소했다. 그러나 사람 많은 성수동에 다시 올 엄두가 날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여름에는, 최대한 동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좋을 것 같다.


이게 과연 이렇게 구구절절 기록할 만한 얘깃거리일지 긴가민가하지만 이왕 썼으니 올려본다.


실제로 보면 맛있어 보임




마감돼서 못 간 곳(주말엔 브레이크타임 없음)


버터라떼&레몬케이크


소금빵 못 산 곳


사진 찍은 곳


피자 먹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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