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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l 05. 2022

피아노 초보지만 베토벤 소나타 4

매일 발행 94일차

피아노 초보지만 베토벤 소나타 3


서너 번쯤 레슨을 받았을까? 선생님이 돌연 오선 아래에 줄을 긋기 시작하셨다. 'ㅌ'자를 눕힌 듯 중간중간이 삐죽 튀어나온 선이었다.



“페달을 한번 밟아볼까요?”

“네에에에? 그, 그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절대로 안 될 말씀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손가락만 움직이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발로 페달까지 밟으라는 건 양손으로 저글링을 하면서 외발자전거까지 타라는 말과도 같았다.


“자, 할 수 있어요. 여기서 밟고, 여기서 갈고.”


나는 내심 ‘페달은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고 진작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한 것은 페달뿐만이 아니었다. 외발자전거는커녕 두발자전거도 못 탄다. 운전면허도 없다. 킥보드? 스케이트? 수상스키? 당연히 못 탄다. 내가 운용할 줄 아는 이동수단은 오직 두 발뿐이다. 걷기만 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내 발이,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절대 못한다며 우는소리를 했지만 선생님은 굴하지 않고 “시-작.”을 선언하셨다. 벼랑에서 떠밀리듯 페달에 발을 올렸다. 한편으로는 ‘혹시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기포처럼 뽀르르 떠올랐다.


물론 쉽지 않았다. 발을 신경쓰려니 손이 엉켜서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버렸다. 더 헷갈리는 점은, 건반을 누르면서 동시에 페달을 밟는 게 아니라, 건반을 누른 ‘직후’에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안 될 것 같은데’와 ‘난 누구 여긴 어디’, ‘으아아악’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혼돈에 휩싸인 채 마구잡이로 누르고 밟았다.


“오, 됐어요, 지금처럼.”


엥? 그럴 리가! 뭐가 된 거지?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어안이벙벙했지만 선생님은 하다보면 익숙해질 거라며 다음 레슨 때까지 연습해보라고 하셨다.


레슨이 끝난 뒤, 나는 유튜브를 뒤지며 본격적으로 페달 밟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건반을 하나만 치면서 페달의 감을 익히기, 한 마디만 계속 연습해보기 등등 연습할 방법은 많았다. 역시 시작이 반이고 처음이 어려운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페달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밟을 때마다 디딜방아 찧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어쨌든 예전처럼 페달이 마냥 두렵지는 않다. 페달 없이 혼자 연습했던 월광 1악장도 나름대로 페달을 갈며 치게 되었다. 그러자 확실히 예전보다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피아노는 내게 단순한 악기 연주 이상의 경험이었다.


비창 1악장을 마치게 된 과정도 그랬다. 사실 피아노를 하루에 한두 시간씩 꾸준히 연습한 건 아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어느 날은 안 치고, 어느 날은 갑자기 삘이 꽂혀 몇 시간씩 연습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르니 어느새 마지막 마디를 연습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 두 마디씩 마스터하면 150일 후에는 끝나겠지’ 식의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무조건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런 ‘계획과 실천’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던 것이다. 때로는 마음 가는 대로 적당히 걸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아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옆에서 동행하며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도 있다면.


어쩌면 글쓰기도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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