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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ug 24. 2022

세상에 가방이 이렇게 많은데

오래 쓴 가방 밑바닥이 닳아 구멍이 나기에 이르렀다. 꿰매서 쓸 수도 있지만 이참에 새 가방을 하나 사볼까 싶었다. 양손의 자유와 양어깨의 균형을 위해 지금까지는 백팩 형태의 가방만 메고 다녔는데, 물건을 넣고 꺼내기 번거롭다는 단점이 점점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숄더백은 흘러내려서 불편할 것 같고, 손으로 늘 손잡이를 들고 다녀야 하는 핸드백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크로스백이다. 가볍고 심플한 크로스백을 사자.


...그리고 또 한 번의 쇼핑지옥이 열렸다.


네이버 쇼핑 검색창에 '천가방 크로스백' 검색어를 넣어 무한 클릭을 시작했다. 다음, 다음, 다음, 다음, 다음...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페이지 번호가 10을 넘고 20을 넘어 39에 이르렀는데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세상에 가방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원하는 가방이 없다니! 아아, 나에게 쇼핑이란 왜 이다지도 힘든 시련인 것일까!


뭐 대단한 기능을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가볍고 평범한 에코백이면서, 세로보다 가로가 넓은 형태의 안정감 있는 직사각형이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면서, 주머니는 벙벙하지 않게 한두 개 정도만 붙어 있으면서, 어깨끈과 연결고리가 튼튼하면서, 장식 없이 심플한 짙은 색이면서, 지퍼로 여닫게 되어 있는 3만 원 내외의 가방을 사고 싶었을 뿐이다. 생활방수도 되면 좋겠지만 그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조건이 많은 것 같지만, 정리하면 그저 '가방' 하면 딱 떠오르는 기초적인 모양이 아닌가? 네모난 천을 네모나게 꿰매서 끈과 지퍼를 달면 끝이란 말이다! 원가로 따지면 5천 원도 안 될 듯하다. 왜 이 많은 가방 생산자들이 이런 가방을 만들지 않는 걸까? 왜 (거의) 모든 에코백이 짧은 손잡이에 세로가 긴 형태로 통일되어 있는 걸까? 내 검색 실력에 문제가 있는 걸까? 손재주만 있으면 진심 내가 만들고 싶다...


쇼핑이라는 게 이래서 어렵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다르고, 소비자들이 원할 거라고 생산자들이 예상하는 것이 또 다르고, 생산자들이 만든 것 중에서 내 눈에 노출되는 것이 또 다르다. 결국 내 필요에 정확히 부합하는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내가 그럴 능력이 돼야 말이지.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가방 하나를 주문했다. 그런데 이틀째 '상품준비중'이다. 설마 재고가 없는 건 아니겠지...? 아아, 정말이지 쇼핑은 피곤하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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