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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Feb 24. 2020

옷장 속 열대우림의 사정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다 보면, 왜 서로의 반대편에 서게 되는 걸까? 나의 경우 남편과의 일이 그렇고, 옷장의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이렇게 말하면 옷장은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나 말고도 얼마든지 사례로 꼽을 만한 것들이 많지 않냐고.     


그런데 유독 옷장의 일에 엄격한 이유를 묻는다면, 일단은 크기 때문이다. 안방의 한쪽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가장 덩치 큰 물건이다. 시즌마다 새로운 이슈 거리를 던져주기도 하고. 아무튼 신혼 때부터 애물단지였다. 그래도 우리 부부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 옷장님은 부디 서운해 마시길.     


아니, 부부의 성향이 얼마나 다르기에 이러는지 궁금하다고? 우리 집에 와서 장롱문을 열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장롱문을 어떻게 여느냐고? 그만큼 시각적으로 대비가 된다는 말씀. 우리 집에 오기 힘든 여러분을 위해 설명해 드리겠다. 장롱의 왼쪽부터 내 옷장, 남편의 옷장, 그리고 오른쪽은 이불 및 수납장이다. 그렇다면 가장 왼쪽 장의 문과 가운데 장의 문을 열어보자. 확연히 알 수 있다. 밀도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억새밭과 열대우림을 함께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옷장 속 밀도가 보여주는 두 사람의 차이는 ‘버리기’에 있다. 난 버리기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는 까마귀처럼 잘도 모아두는 사람이다. 지난 4년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두 사람은 옷장 외교를 펼쳐 왔지만, 실효되지 않는 여러 조약만 수립했을 뿐이었다. 서로의 다름만을 처절하게 파악한 채로.     


열대우림이 점점 자라나서 장롱문틈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와, 종래에는 문을 부숴버릴 것 같다는 상상을 종종 한다. 방안에 홀로 장롱과 마주 보고 침대에 누울 때면, 장롱문을 더욱 꼭꼭 닫아두곤 한다. 언젠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열대우림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던 날, 옷들에게 쫓기는 꿈을 꿨던 탓일지도 모른다. 이런 내 속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옷장은 참 꾸준히도 우림을 유지하고 있다.    

 

열대우림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그의 사정도 들어볼 겸, 2020 ss시즌 맞이 옷장 정리는 사이좋게 함께 해보기로 했다. 따뜻한 날씨에 제주의 초령목도 한 달 일찍 개화했다니, 봄을 맞이한 옷장 정리도 3월이 오기 전에 시작해보자.      


옷장 정리를 시작하고부터 30분이 지났다. 내 옷장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편. 서랍장에 들어갈 겨울 스웨터와 니트를 빼내고, 드라이할 코트와 패딩 3벌 그리고 버릴 옷 4개. 그런데 옆 자리 짝꿍은 도무지 진척이 없다. 옷으로 산을 만들어놓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워낸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죠? 머릿속 경광등이 울린다.

“이건 나중에 살찌면 입을 수 있겠지? 이건 운동할 때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아! 이건 버리면 안 되는 거야. 왜냐면...”

아무것도 정리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버릴 옷은 ZERO.     


우림의 변을 들어봅시다. 먼저, 살이 쪘다 빠졌다 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답니다. 지금은 살이 빠졌지만(쪘지만), 언제 다시 찔지(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이라도 다 필요한 거라고. 덕분에 옷장은 M, L, XL를 망라하는 사이즈의 옷들로 가득 차 버렸대요. 정작 제 사이즈의 옷은 몇 벌 되지 않으니, 입을 옷은 없어 보이고요. 하는 수 없이 옷을 또 사야만 했고, 우림은 자꾸만 자라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래. 사이즈 탓뿐이라면 이해하겠다. 그러나 그는 버리는 것 자체에 알레르기가 있다. 그의 인생 좌우명 또한 유비무환(有備無患). 주인이 버리질 않으니 옷들도 점차 목소리가 커졌다. 옷을 버리려 할 때마다 그들이 자아내는 사연들도 참 구구절절하다. 그의 치열한 20대를 함께 건너온 야상점퍼, 5년째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라도 검을 들 준비를 하는 검도장 단체 티, 어리바리 신입 시절을 지켜줬던 맞춤 코트 등. 사연이 너무 절절해서 차마 몰래도 버리지 못한다.     


사물에, 과거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결혼 전 내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나 역시, 까마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옛날 물건을 버리지 못해 방안에 쌓아두고, 한 번씩 꺼내 보면서 추억 여행 떠나기를 즐기곤 했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변했느냐고? 그건 나보다 더한 까마귀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집안에 까마귀 인간은 한 명이면 족하다. 누군가 한 명은 버리고 치워야만 하는 운명을 따르게 된다. 그것이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근사한 가정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반쪽과 나는 평생을 살면서 점점 서로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네가 왼편을 맡으면, 나는 오른편을. 네가 자상함을 맡으면, 나는 엄격함을. 네가 쌓아둠을 맡으면, 나는 비움을. 그리고 서로의 반대편에 선 상대를 열렬히 미워하기도, 연민하기도 하다가 한 번쯤 반대쪽의 사정에 대해 생각해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 오늘 아침 열대우림의 카오스 앞에서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스무 개의 뒤집어진 니트와 셔츠, 바지, 양말 뭉치들과 막 벗어던진 것 같은 잠옷을 개던 중이었다. 동그래진 양말을 잡아 빼다가 그냥 집어던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네모난 버튼을 눌러 커피 머신을 켠다. 푸쉬시시... 커피 머신 속 캡슐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머릿속 열기가 1도 내려간다. 머그잔을 들고 커피 한 모금, 우림과의 평화적인 공존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 지를 생각한다. 카페인의 향기가 마음에 작은 바람을 불러온다. 다시금 열대우림의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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