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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Jan 02. 2020

매일 시험 보는 기분

매일을 시험 보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일 년은 그래온 것 같다. 나를 테스트하는 이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꽤 힘들게 사는구나 싶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자처해서 보는 시험이니 불쌍해하지 말자. 테스트에 자처한 이유는 아마도, 출제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스트의 종류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다. 체력테스트, 인내력 테스트, 심리테스트, 추리력 테스트, 창의력테스트....... 다방면에서 뛰어날 것이 요구된다. 난이도는 출제자의 기분에 따라 좌우된다. 쉽게 풀려버릴 때도 있지만, 무지하게 어려울 때도 있다. ‘살면서 나를 이 정도로 한계까지 끌고 간 사람은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문제일수록, 풀고 나면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해주기도 한다. 내 인생의 어떠한 연인, 인연들보다도 나를 울고 웃기는 출제자는 바로 네 살 김유은 어린이, 내 딸이다.     


아무튼, 유은 어린이와의 테스트 일화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랄 수 있지만, 이 테스트는 체감 난이도가 100배라는 점을 감안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뚝 떨어진 기온에 몸살기가 찾아와 자꾸만 눕고 싶어지는 오후였다. 어린이집 하원 후 집에서 노는 시간. 유은이는 요즘 책 읽기와 잔치 놀이에 빠져있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각자 책을 읽자고 했다. 작은 유아용 책상 위에 커다란 그림책을 펼쳐놓고 책을 읽었다. 정확히는 읽는 시늉을 했다. “옛날에~”로 시작해서 “~~~했답니다아~ 그런데에~ ... 했지요~~”로 구성된 책 읽기다. 혼자서도 책을 잘 읽는다 싶어서 나도 옆에서 다른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책 한 권도 다 읽기 전, 유은이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재미가 없는 걸까? 이쯤에서 첫 번째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부문은 프로그램 기획력.

책 읽기가 지루한 모양이니.... 분위기의 전환이 필요하다! 활동적인 듯하지만, 비활동적인, 침대에서 하는 동굴 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실은 누워있을 심산이었음). 동굴 놀이는 유은이 최애 놀이여서, 승률 100% 기획안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잘 통과되어 우린 안방 침대로 향했다. 아무 문제없이 끝이 나나 했는데, 한 가지. 간식 그릇도 침대로 가져가고 싶어 했다. 아, 유은이가 후렌치파이를 먹고 있었지. 후렌치파이는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지는 과자로, 먹는 시간보다 치우는 시간이 더 긴, 이 집의 유일한 치우는 사람인 나에겐 애증의 과자다. 더군다나 침대나 소파에서는... 상상만 해도 손이 오그라든다. 간신히 타협해서 간식 그릇은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동굴 놀이 시작. 이불로 동굴을 만들고, 토끼 두 마리가 되어 호랑이를 기다리면 된다. 기다리고 기다린다. “아기토끼야, 호랑이 아직 안 왔나 봐. 계속 숨어있어~” 하고 속삭였다. 기다리다 보니, 점점 졸려 와서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하고 있는데, 아기토끼, 후렌치파이를 먹겠단다. 눈을 질끈 감고 간식 그릇을 집어서 아기토끼, 아니 유은이에게 주었다.

그런데 유은이는 “아니야~ 이게 아니야~~”하며 화를 냈다. 앗, 스스로 가져오고 싶었나? 다시 간식그릇을 탁자 위에 놓았다.

“아니, 아니이. 아니야아~~!!”하며 아까보다 화를 더 낸다. 이로써 두 번째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추리력 테스트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이도 급상승. 유은이가 울어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앙~!!!

“왜 그래? 유은아, 왜 우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알고 싶어~ 알고 싶어~”라며 우는 것이다.

응? 무슨 상황이지? 테스트는 계속된다. 이번엔 심리테스트?


“뭐가 알고 싶은데~ 이리 와. 엄마한테 와.” 하고 안아줬다. 그러자 유은이는 품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거실로 나가버렸다. 궁금한 마음과 당혹스러운 마음을 함께 안고, 거실에 나가 마주한 풍경은 한 시간 전의 바로 그 풍경이었다. 책상에 앉아 아까 읽던 그림책을 펼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챙 익는 거어, 알고 싶은 데에~~ ” “알고 싶어어~”라며 유은이는 울고 있었다. 이제야 상황 파악 완료. 엄마처럼 책을 읽고 싶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었나 보다(맞나요? 유은양?)


유은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아직 한글을 배우지 못해서 책을 못 읽는 게 당연하며, 나중에 학교에 가면 혼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래도 책 내용을 기억해서 읽으려고 한 것 자체도 대단하다며 칭찬도 잊지 않고 듬뿍 해주었다. 이제야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며 슬며시 웃는다. 하아- 이거였구나. 한숨을 놓으면서 테스트는 종료됐다.      


지난 금요일 오후의 테스트는 최종 통과로 마무리 지어졌다. 이로써 우리 집 가정의 평화도 지켜졌고, 104호의 층간소음으로부터도 지켜냈다. 이번 테스트의 성적은 몇 점일까. 아마도 B+는 받을 수 있겠지? 평균 C+의 엄마의 성적표로서는 꽤나 선전을 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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