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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May 28. 2020

크레파스 괴담 이야기

이 이야기는 설거지하던 엄마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고무장갑을 내던지고 뛰어가고, 검은 손가락의 아이는 얼굴과 옷이 모두 검어졌다는 괴담이다.     


오늘 밤, 엄마가 저녁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며칠 전 엄마가 새로 사준 전집에 푹 빠진 나는 몇 권을 골라 거실로 왔다. 아, 이거다. 제일 재미있는 책 <크레파스 사다리>. 이 책에서는 다다라는 아이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다가 크레파스가 밖으로 삐져나갔는데, 공중에서도 그림이 계속 그려져서 하늘까지 사다리를 그린다. 난 이게 너무 재미있다. 공중에 그림이 그려지다니...


엄마는 열심히 설거지 중이다. 물소리에 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저기에 크레파스가 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색색깔의 크레파스. 나도 다다처럼 그림을 그려봐야겠다. 다다는 파란색으로 그렸지? 나는... 검은색! 크레파스 케이스를 열고, 그림을 그려볼까. 종이 위에 그리고, 종이 밖을 벗어나 공중으로...! 다다도 크레파스로 공중에 그림을 그렸지. 문득, 이런 노래가 떠오른다.


“어젯바암에 우이 아빠가아~ 다정하신 모씁으로오~ 한 손에는 크레파스르을~~”

내가 노래를 예쁘게 부르는데, 엄마는 왜 나를 보지 않지? 엄마에게 말을 걸어볼까?

“엄마, 이거 여기 칠해도 되요?”      

유은이의 노랫소리와 예의 바른 물음에 기분 좋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안돼애애애~!”


뒤를 돌아봤을 때, 유은이는 양손이 뭘 묻혔는지 까매졌고, 그 까만 손을 하얀 벽지 위에 문지르려 하고 있었다. TV 진열대와 마룻바닥은 이미 정복된 모습이었다. 거품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유은이에게 뛰어갔다. 유은이는 해맑은 얼굴로, 손에 묻은 크레파스 검댕을 바닥에 문지르며 말한다. “나~~ 공중에 그림 그리려고 했는데?”


그리고 바닥에 놓여있는 <크레파스 사다리>책. 아, 이 책 때문이었구나. 책 속 이야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이 귀엽다가도, 난장판이 된 집안을 보니 울고 싶어진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란 이런 거구나. 설거지를 다 끝내기도 전에 또다시 일감을 던져주는 너는 갑 중의 갑, 최고 보스.

이미, 얼굴과 옷은 너무 검어져서 회복 불가능. 아이의 옷을 벗기고 욕실에서 얼굴과 몸을 씻긴다. 욕실에서도 유은이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노래를 부른다.


“어젯바암에 우이 아빠가~ 다정하신 모씁으로오~ 한 손에는 크레파스르~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 음!”

나 역시, 어렸을 때 불렀던 아빠와 크레파스 노래지만 너를 씻기는 이 밤, 으스스한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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